새벽부터 장대비가 내렸다. 그 핑계로 겨우 새벽기상을 마치고 정신없이 다시 잠을 청한 나는 기억나지도 않는 꿈 속을 헤매다 문득 이상한 기운에 눈을 떴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7시30분.
직주근접 일터에 출근하는 나는 그렇다쳐도 고1 아들은 지각할수도 있어서 놀란 나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아들을 깨웠다. 한번도 스스로 일어난 적이 없는 녀석이라 늦었다고 호들갑을 떨며 깨우고는 어제 저녁에 먹던 찌개를 데우고 달걀 프라이를 해서 최소한의 밥만 퍼주었다. 내 딴엔 굶고 가는 게 안쓰러워 밥을 챙겨준다고 줬는데 식탁에 앉아 우거지상을 하고는 겨우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씹더니 아이는 짜증을 내며,
"엄마, 제발 아침엔 시리얼 주면 안돼? 아침에 나도 시리얼 좀 먹어보자."라고 말했다.
그래, 오늘은 내가 늦잠 잤으니, 할말은 없다. 그럼에도 저 버릇없는 말투에는 정말 자주 들어도 당최 면역이 안 생긴다. 그런 날카로운 말을 들으면 귀와 뇌의 신경회로가 일시정지가 돼서 그 음성이 내 귀에, 내 머릿속에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시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아이의 등교여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이미 어제 밤 또 고이고이 잘 묵혀왔던 학교 계속 다닐지 여부를 두고 입씨름까지 벌여 두통까지 앓고 난 후라 멍한 상태인데 날씨까지 비가 오는 흐린 날이라 기분은 더 덜 마른 걸레마냥 축축하고 더러웠다.
실제로 바지까지 젖어오는 오랜만의 굵은 빗방울은 내 우울한 마음과 무거운 발걸음을 더 더디게 했다. 장우산까지 들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에는 뛸만한 상황인데도 빗물에 젖어서 무거운지 내 마음 세포가 다리까지 전이돼서 그런지 도저히 뜀박질이 힘들었다. 지각은 면했지만 빠듯한 출근으로 담당 주무관이 얼마나 바빴을지 알기에 미안하고 면목없었다. 그런 어색한 마음으로 허둥지둥 가방을 내려놓고 아침 과업을 처리하기 위해 업무용 컴퓨터 접속을 위해 책상을 살피던 중 익숙한듯 낯선 텀블러를 발견했다. 나와 같은 기간제 동료직원이 손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가득 채워 담아 두고 간 것이다. 순간 눈가가 따뜻해지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물론 마스크에 가려져 담당 주무관에게 들키진 않았지만.
사진출처 : 픽사베이 little-girl-8868597_1280 "배려란, 남을 생각하는 마음. 남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미리 생각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채인선 작가는 자신의 작품, <아름다운 가치사전>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배려는 '기꺼이 남을 위해 시간과 곁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오후 나는 짜증나는 일을 겪어 많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감정을 삭히고 바로 퇴근했어야 하는데, 괜히 아침에 내게 배려 한 컵을 건넨 그 직원의 바쁨도 외면하고 퇴근길에 내 감정을 배설해버렸다. 맘이 복잡했을텐데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었고, 귀를 열어주었다. 결국 평소보다 늦은 퇴근에 걱정된 직원의 배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허겁지겁 내리느라 그만 휴대폰을 그 직원의 차에 에 두고 내렸다. 문을 닫고 차가 출발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미 부를 수도 없어서 내가 버스를 타고 가지러 가기로 했는데, 미안하게 또 차를 끌고 아파트 로비까지 와서 건네주었다.
배려를 받고 민폐로 갚은 셈이다. 너무 미안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다. 귀중한 시간을 빼앗았고, 풀어야 할 피로를 더 쌓이게 했고, 차량을 두 번 움직이느라 연료비까지 더 들게 했다. 내가 바로 말로만 듣던 '착한 척 하는 빌런'인가? 자괴감이 든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감정이 이성을 덮어버린 날이다. 돈으로 실수를 만회하려는 불순한 의도는 절대 없지만, 미안함을 담아 밥이라도 사야겠다. 어차피 추석 연휴를 앞둔 날이기도 하니까, 겸사겸사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전해야겠다.
"쌤~어젠 정말 미안했어요. 그리고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구요."
*사진출처 : 픽사베이 tumbler-1141198_1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