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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오름 Oct 06. 2024

연두색을 좋아하던 소녀가 다정했던 소년에게 1

뒤를 돌아보면 웃는 네가 있었어

To. K에게


내가 널 처음 본 게 언제였을까.

아마도 새 학기 첫날이겠지?  

나는 옆 동네에서 전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여서 모든 게 낯설었었어.

동네의 지리도 잘 몰랐고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어디로 어떻게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인지도 몰랐어.

그래서 그날은 일찌감치 등굣길을 나섰고 덕분에 입학 첫날부터 교실에 제일 먼저 도착해 앉아있게 됐지.


1학년 7반.

파란색 팻말이었던 걸로 기억해.

내가 배정받은 학급표를 확인하고 시계를 쳐다보며 내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얼마나 듣고 있었을까.

조금씩 모르는 얼굴들이 하나둘씩 우리 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시작했어.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인 건지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어느새 그룹을 만들고 있었어.

앞뒤로 앉은 애들끼리도 통성명을 하며 빠르게 친구를 사귄 애들도 있었지.

그런 아이들 사이에 나는 철저하게도 혼자였어.

따돌림 이런 건 아니였고 그 당시엔 아무도 나를 몰랐고 나도 아는 애가 없었거든.

우리 반뿐만이 아니라 옆 반, 그 옆 반을 가도 나는 아는 친구가 없었어.

내가 오래 살던 동네도 아니었고 내가 입학하게 될 학교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곳이었으니 당연했지.


그렇게 점점 가득 차는 교실 안 후끈한 공기가 답답해져서 선생님이 오시기 전 화장실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맨 뒷자리 구석에 홀로 앉아있다가 조심스럽게 일어났지.

시간은 아직 10분 정도가 남아있었어.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파란색 휴지통 옆으로 닫혀있는 오래된 나무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에

툭, 누가 내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갔어.

많이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엄청 놀란 상태긴 했던 것 같아.

어깨를 맞아서가 아니고 방금 뒷문으로 들이닥쳤던 너랑 네 친구들 때문에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넌 친구들 무리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었어.

워낙 잘생겼었어야 말이지.

이 얘기 듣는다면 너 아마 속으로 엄청 우쭐대겠지?

아닌가? 생각보다 넌 굉장히 겸손했으니까 그저 근사한 얼굴로 웃고 말았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나는 네가 잘생겼다고 생각하진 못했었어. 진짜야.

나중에 계속 보다 보니까, 친구들이 다 잘생겼다고 해서 그런가? 곱씹어보다가 알게 됐지.

아. 얘 진짜 잘생겼구나, 하고.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당연하게도 잘생긴 얼굴인데 그땐 경황이 없어서 몰랐네.

“아, 미안. 괜찮아? 안 다쳤어?”


넌 아마도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교실로 들어오려다가 예상치 못하게 내가 열어젖힌 문 때문에

타이밍이 어긋나서 나랑 부딪친 것 같았어.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람을 쳤다는 그 상황에 당황한 너와는 다르게

사실 나는 네 친구들 때문에 더 많이 당황스러웠었어.

그 나이대 남학생들이 그렇듯 어지간히 장난스러웠어야 말이지.

그 잠깐의 부딪침과 어색한 우리 대화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이상한 노랫소리.

일부러 더 어색한 분위기로 몰아가면서 이상한 환호성을 지르는 탓에 반 아이들이 우리 쪽을 쳐다봤어.

난 괜찮냐고 물어보는 네 질문에 어영부영 그렇다고 대답하고 화장실로 도망갔지.

창피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부끄러웠던 건가. 모르겠어.

정신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빠르게 뛰쳐나가고 있더라고.


찬 물에 손을 씻고 처음 입어보는 교복에 두 손을 문질러 닦으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지.

지금 내 얼굴, 약간 빨갛나?

그러고는 너무 늦지 않게 교실로 돌아가야 하니 심호흡을 하며 발걸음을 뗐어.

그리고 뒷문을 열어 내 자리로 걸어가려는데 아차 싶었지.

당연하게도 내 옆자리는 아직 비어있을 줄 알았는데 남색 교복을 입고있는 한 사람의 등이 보였어.

교실 맨 뒤 책상 두 자리 중 하나는 내 자리, 그리고 옆으로 누가 앉아있었거든.

뒷모습이었는데. 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뒷모습이었는데 나는 그 순간에 너라는 걸 어떻게 알아봤을까.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네가 앉은 내 옆자리, 아닌가. 내가 네 옆자리인 건가.

아무튼 조금 많이 놀랐어.

친구가 많아 보이던 너는 당연히 친구들 사이 교실 중앙 그 어딘가에 앉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아니 정확히는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했었던 것 같아.

만약 이 교실 안에 네가 있을 자리가 있다면 그쯤이 아닐까 생각해 봤을 뿐이야 그것도 뒤늦게 말이야.

근데 얘가 왜 여기 있지?


순간 당황하긴 했는데 어차피 정해진 자리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니어서 주름진 교복치마를 펴고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어.

시선이 자꾸 너에게로 가려는 걸 참느라 초록색 칠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내 교실 앞 문이 열리더라.

그리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어.

학급 생활과 입학 주의사항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셨지.


사실 기억도 안 나. 너무 오래전 일이잖아.

내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건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건 아닌지 별게 다 신경쓰였던 것 같아.

그다음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짝꿍을 정하겠다며 제비 뽑기를 했던 것밖에는.

지금 생각해 보면 복불복이었던 제비 뽑기.

반 친구들은 다 신나 보였어. 서로서로 몰래 종이를 바꿔치기하는 애들도 있었지.

난 바꿔치기할 친구도 없었고 어떤 특정한 자리에 욕심이 있지도 않았어.

뭘 알아야 말이지.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고 말 한마디 섞어본 지인도 없는데 뭔 관심이 있었을까.

그저 될 대로 돼라, 맨 앞자리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선생님 눈에 너무 띄고 싶지 않으니까 이왕이면 맨 뒷자리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


마침내 제비 뽑기가 다 끝나고 서로의 책가방과 짐을 들고 각자 번호가 적힌 순서대로 자리를 이동했어.

한참을 시끌벅적하던 교실은 어느새 순서대로 각자 자리를 찾아가고 나서야 조용해졌어.

맨 앞자리에 앉아 벌써부터 학구열을 불태우는 친구들도 있었고

바꿔치기에 성공한 친구들은 이미 더 낄 자리가 보이지 않게끔 두터운 우정을 쌓고 있었어.

나는 그 순간에도 맨 뒷자리는 아니지만, 그 바로 앞자리라는 것에 만족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짝꿍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

지금도 그때 내 첫 짝꿍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

괜히 기억도 잘 안나는 그 친구한테 미안하네. 처음 보는 애였거든.

하긴 뭐, 나한테는 1학년 7반의 모든 아이들이 다 처음 보는 애들이긴했지.

그 날 누가 내 짝꿍이었어도 큰 감흥이 없었다는 얘기야.

서랍 안에 미리 받은 교과서를 구겨 넣고 있는데 곧 선생님이 안내문을 돌리셨어.


뒷사람에게 전달!

네!

전달, 전달, 전달.


무슨 안내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거려보는데 기억이 안 나, 진짜로.

그냥 회색 빛의 거뭇거뭇한 이면지에 인쇄된 안내문이었던 것밖에는.

그 안내장이 하나둘씩 앞에서부터 넘겨져 오는데 마침내 나에게도 두 장이 건네졌고

한 장은 내 책상 위로 올려두고 이제 내가 할 일은 내 뒷자리에 안내문을 넘겨주는 거였어.

내 앞에 앉아있던 애들처럼 머리 뒤로 손만 내밀어볼까.

얼굴도 돌리지 않고 팔만 뻗어 종이를 뒤로 넘기는 건 약간 예의가 없어 보이는데...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다들 그렇게 안내문을 넘기고 있었으니까.

아냐, 그래도 이건 좀...  


나는 결국 별 것도 아닌 걸로 잠시 고민하다 뒤에서 왜 아무것도 안 주냐고 짜증을 내기 전에 몸통을 뒤로 돌렸어.

천천히 고개가 돌아가고 안내장을 쥔 손을 길게 뻗었지.

“여기...”

그리고 널 봤어.

내가 돌아볼 줄 알았던 건지 아니면 안내장을 받으려고 벌써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

한 손을 미리 내밀고 있었던 너 말이야.

“안녕? 또 보네. “

“어... 안녕.”



 

안내장을 손에 쥐고 웃는 네 얼굴을 보면서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어.

아무도 모르는 반 아이들과 같은 동네로 이사오며 새로 끼게 된 이방인의 나.

이미 자기들끼리 너무도 친해서 내가 끼어들 틈이 있을까 싶은 교실 안에서

나는 어쩌면 여자 친구보다 남자 친구를 먼저 사귀게 될지도 모르겠다.


새 학기 3월이 그리고 자칫하면 1년 전체가 외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내 중학교 첫 생활.

그런데 네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내 생각 전부를 바꿨어.

손을 뻗어 생긴 틈 사이로 갑자기 뒷문으로 들이닥쳤던 너.

돌아봤을 때 나에게 손을 뻗어 웃고 있던 너.

그 땐 키도 나랑 비슷했잖아, 너.

나랑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네가 커보이던지. 똑같은 어린애였는데.

등 뒤에도 눈이 달려있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돌아보면 네가 내 뒤에 있다는 그 사실,

어쩌면 너도 계속 내 등을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이 가슴을 떨리게 했던 것 같아.

그건 설렘이었고 매일 아침 등굣길의 기쁨이었어.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내 막연했던 예감과 기대감은 기분 좋은 현실이 됐지.

넌 내 남자친구가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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