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오름 Oct 14. 2024

연두색을 좋아하던 소녀가 다정했던 소년에게 2

To. K에게


지나가는 낙엽 소리에도 꺄르르 웃는 나이라고 했던가.

돌이켜보면 정말 별 거 아닌 일에도 울고 웃었던 어린 날 우리가 떠올라.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수업시간에 공부에 집중은 안하고...

킥킥대며 쪽지를 접어 전달하다가 선생님한테 걸려서 혼났던 것도 기억나고,

톡톡- 등을 두드리기에 돌아보면 딴청 피우고 있던 네 얼굴도 생각나.

그 때는 왜 이렇게 제비뽑기를 자주했었을까?

한달에 한 번 짝꿍을 바꿀 때면 어김없이 종이에 번호를 썼잖아.

내가 서기여서 그 종이에 번호 쓰는 건 내 몫이었거든.

칠판에 자리배치표를 적는 것도 내 몫이었고.

숫자가 적힌 종이를 빈 통에 집어넣고 뒤섞어 선생님께 건네면,

선생님이 들고 계시던 바구니에서 반 친구들이 종이 쪼가리를 하나씩 순서대로 선택해서 들고갔어.

그 종이 쪼가리들의 감촉도 생각난다.

거칠거칠하고 퍽퍽했던 회색빛 이면지, 그리고 위에 쓰인 숫자까지도.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가 짝꿍이 된 적도 있었어.

우리가 사귀는 걸 알고 있던 친구 몇몇은 장난스럽게 우리가 번호를 바꿔치기 한 거 아니냐고 묻기도 했었어.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난 생각을 실행에 옮길 용기는 없었어.

그러고보니 너는 어땠는지 묻지 못했네.

짝꿍 되니 좋냐고 계속해서 장난치던 친구들한테도 넌 그냥 웃고 말았었잖아.

번호를 바꿨든 아니든 그런게 뭐가 중요했겠어.

우리가 짝꿍이 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 그게 중요한거지.


날이 쌀쌀해진 가을 날이었던 것 같아.

그날따라 유독 몸이 좋지 않아서 체육 수업에도 빠지고 보건실에 가서 약을 받아 먹고도 난 오전 수업시간 내내 골골거렸었어.

흔한 감기였던건지 몸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미리 선생님께 몸이 좋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수업시간에도 엎드려있었어.

머리가 지끈거리고 배도 살살 아팠던 것 같아.

무릎 아래로 담요를 덮고 팔을 베고 누워있는데도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찬바람이 종아리 사이로, 가려진 얼굴 사이로 들어왔어.

한겨울도 아닌데 코가 시리고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어.

조퇴를 시켜주지 않아서 그렇게 버티고 엎드려 약 효과가 돌기를 기다렸어.

조금씩 가물거리는 눈을 꿈뻑거리고 있는데, 추워서 잔뜩 웅크린 내 등 뒤로 담요가 덮어졌어.

어디서 구한건지, 어떤 친구한테 빌린건지는 몰라도 넌 내 등 위로 담요를 걸쳐줬어.

엎드리고 있어서 얼굴이 눌렸을텐데...

못생겨보일까 걱정 됐지만 고개를 살짝 떼서 옆으로 얼굴을 돌리니 네가 보였어.

“좀 자. 쉬는시간에 깨워줄게.”   

별 거 아닌 그 말에 왜 이렇게 안심이 됐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난 포개진 내 손등 위로 이마를 대고 엎드렸어.

이상하지.

방금 전까지 그렇게 쌀쌀하다고 느꼈던 교실인데.

왜 갑자기 훈훈하게 느껴졌을까.

네가 덮어준 담요 때문이었을까.

이후로 가물거리던 눈꺼풀도 감기고 수업 하나가 다 끝나도록 약기운에 취해 잠들었던 것 같아. 푹 자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었어.

그리고 오후에는 다행히도 몸 상태가 회복됐고 종례까지 마쳤어.

보는 눈들이 있기도 하고, 각자 친구들도 있어서 굳이 우리가 같이 하교를 하지는 않았었는데 그날은 너랑 같이 하교를 하게 됐어.

그냥 집으로 가는 길인데, 매일같이 걷는 길인데 왜이렇게 떨리는건지.

집 앞에 다다라서 너는 나를 배웅했어.

아프지 말고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고 사라지던 너의 뒷모습을 힐끔대다가 네가 보이지 않고나서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

이제 아픈 건 다 나은 것 같은데. 그래도 아프니까 어린 애가 된다고 네가 유독 더 나를 신경 써주는 게 좋았던 것 같아.


그리고 며칠이 훌쩍 지났어.

난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예쁜 쇼핑백 안에 포장한 선물을 챙겨 집을 나섰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할 과자, 초코 과자를 고르고 고르고, 그렇게까지 무언가를 선물하기위해 고민했던 적은 처음이었을거야.

그 날은 빼빼로데이였어.

주말부터 시내를 돌아다니며 한참을 만지작거리고 둘러보고 구경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내 손으로 직접 쓴 편지와 함께 리본과 포장지를 풀어헤치기를 반복하며 준비한 초코 과자, 선물 꾸러미.

그 초코 과자들이 뭐라고, 그땐 그게 그렇게 떨리고 설렜는지.

난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네 자리에 몰래 쇼핑백을 놔두고 자리에 앉았어.

넌 그러고도 한참 후에 교실로 들어왔어.

책상 위에 놓인 내가 놓은 쇼핑백을 확인해보더니 나를 쳐다봤고 입모양으로 고맙다고 말해줬어.

그리고 이따 집에 같이 가자고도 덧붙였어.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지.

사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네가 나한테 빼빼로를 언제 줄까 기다린 것도 같아..

사실 초코 과자는 안 받아도 그만이었는데...

다른 친구들도 챙겨주는 빼빼로를 막상 너한테 받지 못하니까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괜한 서운함이 몰려 오더라.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는데도 잘 안 됐을 거야, 아마.

종례를 마치고 책가방을 둘러 메고 교실을 나가려고 일어나니 그제야 하루종일, 그날따라 조금 낯설게 느껴지던 네가 나에게 다가왔어.

“집에 가자.”

그래, 집에 가자.

그렇게 한 발 한 발 걸으며 걷는 동안 우리 집 근처에 도착했어.

진짜 끝까지 빼빼로는 안 줄 건가 싶었지만, 그래 그게 뭐 어떻다고.

이렇게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더 중요하지.

괜히 쪼잔한 모습을 보인 것 같기도 하고 나만 유치하게 어린 애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뻘쭘해져서 일부러 더 밝게 인사를 했어.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고 너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왔어.

그리고 다시 나타난 네 손엔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모를 커다란 상자가 들려있었어.

넌 그 상자를 나에게 건네줬어.

아... 그러면 그렇지, 안 챙겨줄리가 없잖아.

그런데 무슨 빼빼로를 이렇게 큰 상자에...

괜히 더 미안하고 뻘쭘해져서 고맙다고 말하고는 상자 안을 열어보는데 빼빼로보다도 눈에 띄는게 있었어.

상자 안에는 곱게 개인 목도리와 손편지가 있었거든.

편지는 부끄러우니까 집에 가서 혼자 보라고해서 바로 열어보진 않았지만...

상자를 열자마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네가 과연 그때 내 마음을 알까.

집으로 들어와 다시 한번 상자를 열어 손편지를 얼마나 읽어봤었는지...

그리고 상자 안에 눕혀있던 목도리를 꺼내 내 목에 둘둘 말아놓고 거울 앞에서 그날 얼마나 오래 서성거렸는지.

넌 글씨체가 예쁜 편은 아니었어.

그런데도 그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꾹꾹 눌러 적은 손편지에 내가 그날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그 오래 전, 빼빼로데이가 생각나.



“생일 축하해.”


그 해 내 생일과 겨울은 정말이지 따뜻했어.

네가 선물해준 목도리 덕분이었는지도 몰라.

그 언젠가 나한테 무슨 색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던 너에게 음, 연두색? 하고 별 생각없이 이야기했었던 걸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어.

연두색 목도리를 찾아다니느라고 주말에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너를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더라. 네가 선물한 목도리는 딱봐도 흔한 색과 디자인이 아니었거든.

한 명은 초코 과자를 찾아서,  또 한 명은 연두색 목도리를 찾아서 가게를 샅샅이 뒤지고다녔을 그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


생각해보니 나, 그 해 겨울은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지나갔더라.

그래서 더 고마웠어.

그리고 내가 정말 많이 좋아했었어.

그렇게까지 누군가를 순수하게, 또 진심으로 좋아한 적 있었을까.


이제 다시 가을이야.

나도. 그리고 네가 태어난 계절이기도 해.

지금 우리는 서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남남이 되었지만,

그래도 올해 겨울은 네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바라.

누군가의 손길과 눈빛이 담긴 애정의 온도로 따뜻한 겨울을 지내길 바라.

너의 옆에 누군가가 함께하고 있기를 바라.

쓸쓸함이 아닌 낭만적인 가을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라.

그런 하루, 그런 가을날을 보내고 있기를 바라.



이제 그만 안녕, 내 첫사랑.

너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