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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오름 Sep 16. 2024

고개를 들고 시선을 높이

다시, 오늘

눈을 뜨니 보이는 곳은 온통 하얀색으로 덧칠해진 병실 안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아도 민무늬에 온통 하얀색으로 무심하게 페인트칠된 그런 낡은 병실이었다. 어딘가 쾨쾨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덥다고 느껴질 정도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쯤 창문을 찾아보려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돌려보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하얀색 벽뿐이었다.


뭐지, 나 갇힌 건가?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문도 보이지 않고 창문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언젠가 본 것 같았던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마치 이곳은 그 영화 속 주인공이 갇혀있던 정신병원 입원병실 같은 곳이었다.


온통 하얀 방. 이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지, 애당초 내가 왜 여기에 갇힌 걸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지금 이곳은 영화 속 한 장면인가? 그렇다면 내가 영화배우인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지금 여기는 어디지?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갇힌 걸까? 내가 내 발로 들어온 걸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문이 없는데 여길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커져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곳이 답답하다 느껴질 때쯤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코로 깊게 숨을 쭉 들이마시고 입으로 후- 크게 숨을 뱉어내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세는 것처럼 그렇게 몇 번인지 몇 백번일지 모르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나의 숨소리로 하얀 방 안을 가득 채우던 그때,  문득 고개를 뒤로 젖혀 올린 순간이었다.


눈을 시리게 할 정도의 밝은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와 나를 비추었다. 뭐지, 이 빛은 도대체 어디서 들어오는 거지? 아니 그런데 무슨 빛이 이렇게...


그제야 나는 사방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여전히 하얀색 벽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  그런데 아까까지는 눈에 띄지 않던, 정확히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의 발끝이 보였다. 시선을 조금씩 올리자 발끝에서 발목, 종아리, 무릎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환자복이 아니었다. 환자복...? 순간 잠에서 이제 막 깬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1초가 지났을까? 아니면 10초?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좌우로 살짝 털어냈다. 꿈을 꾼 건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몽롱했던 정신의 끝자락을 붙잡고 내 머릿속 어디선가 이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을 놓아줄지 말지 잠깐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면 머리 아프잖아, 그러니까 생각을 안 하면 돼.”

“그냥 받아들이면 돼. 고민하지 마.”

“고민하지 말라니까?”


뭐지? 이 목소리는 누구지? 지금 이곳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는데 누가 나에게 말을 거는 거야?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말라니까?”


알 수 없는 목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려온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생각을 하지 말라고? 무슨 생각을 말하는 거지? 생각하지 말라니, 이 전에 넌 누군데? 이 소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들리는 거야? 온갖 말들이 시끄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

“지금 이곳이 병원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하지 마.”


아닌데, 나는... 아닌데. 귓가에 울리는 소리들을 애써 떨쳐내려 고개를 떨구고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웅웅 거리며 울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얼굴을 감싸 쥐고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그만해! 그만! 이제 그만!


그때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뭐지? 방금까지 그렇게 나를 괴롭혀대고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지? 그 목소리는 뭐였지? 누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건 아닐까? 꿈이라면 왜 깨지 않는 거지?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어. 꿈이든 뭐든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대로 평생 여기서 갇혀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이제 그만 탈출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이 슬금슬금 차올라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이제는 두려움에 입이 바짝 마르고 두 눈에 가득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떴지만 계속 담고 있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눈물이 흘러 결국 두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뺨 위로 후드득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끈적끈적해진 얼굴이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 흘리는 눈물이 먼지가 뒤덮여 새까만 눈물자국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얼마간의 많은 때가 낀 눈물을 흘려댔다. 그러자 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시야가 선명해졌다.  


아, 이래서 나는 그 많은 눈물을 흘렸나.

병실이 아니었다. 선명한 시야에 들어찬 이곳은 정신 병원도, 입원실도, 평생 탈출하지 못할 것 같았던 감옥이나 지옥 같은 곳이 아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팬츠를 입고 내 목에 걸린 얇은 스카프를 본 순간, 나를 옥죄고 있는 것 같은 이 스카프 하나 내 몸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기자 얇은 실크 스카프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것은 단지 스카프였다. 끊을 수 없는 쇠사슬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무기력한 환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어느 정신병원의 1인실 같았던 그 방 안에서 과거의 어느 날 지금보다 어렸던 내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학생도, 직장인도, 누군가의 딸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방향을 잃고 길을 잃어 텅 빈 도로 위, 길바닥에 제자리로 우뚝 선 한 인간에 불과했다.


너 도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거니?

길바닥에 홀로 서 저 멀리 어딘가 해가 지는 지평선 끝을 바라보고 있던 뒷모습의 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애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모든 것이 뒤엉키며 현재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왔다.


아, 다시 오늘이다.


바닥에 추락해 있던 스카프를 멍하니 바라보다 시선을 높이 들어 올렸다. 처음엔 눈이 시려 몇 번이나 눈꺼풀을 깜빡이며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려대야 했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니 시야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내리쬘 정도로 시린 빛을 내뿜고 있던 하얀색 병실 천장에서 아주 작은 틈을 발견했다. 조금 더 눈을 깜빡이며 작은 틈을 응시하고 있자니 점점 더 틈이 벌어지며 마침내 사람 하나가 오고 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의 사각형 공간이 눈에 띄었다. 그제야 시원하게 터지는 깊은숨이 나를 살게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창문이었다.

그곳으로 들어갈 수도, 그곳에서 나갈 수도 있는 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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