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환상
가냘픈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속삭임이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울린다
귓가를 긁어대는 작은 목소리
한번 더 뒤를 돌아본다
역시나 그곳엔 아무도 없다
흐르는 물에 머리를 헹군다
잘못 들었던 건 아닐까
방금 그 소리는 뭐였을까
머리카락과 함께 생각을 씻어낸다
하얀 거품이 잘게 쪼개진다
부서진 덩어리들이 흩어지고 흘러간다
번뇌의 이물질들이 씻겨진다
뻣뻣한 머리칼이 손에 잡힌다
미끄러져 흐르는 건 거품일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생각의 쓰레기일까
뒤죽박죽 엉킨 새카만 머릿속을
하얀 비누거품으로 덧칠할 수 있다면
또 다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난 절대로 잡히지 않을 거야
계속해서 너에게서 도망칠거야
잡을 수 있을테면 따라 잡아봐
미끄러진 손바닥 사이로
하얀 거품은 온데간데 없고
물 먹어 뻣뻣한 머리칼이 잡힌다
손바닥 한 줌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남았다
한 손으로 모든 것을 움켜 잡을 수 없기에
오늘도 물 먹은 머리 위로 생각을 덮는다
빳빳하게 말라 건조한 수건으로
축축하게 젖은 두 눈까지 덧씌워 감춘다
그러자 사방이 고요해진다
세계의 문이 닫힌 듯 순식간에 세상이 암흑이 된다
내가 들은 건 속삭임이었을까 환청이었을까
내가 잡고자 한 건 기억이었을까 기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