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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Dec 24. 2020

기다림 연극의 결말

넷플릭스 <8월의 크리스마스> 리뷰



며칠 전 후배와 통화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했다. 후배는 정원을 자기 연민에 빠진 피해자의 서사를 쓰는 인물로 보았다. 나는 다림의 성장 서사라고 이야기했다. 정원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을 다림에게 말해야 했을까? 정원은 자기 연민에 빠져 갇힌 인물일까? 어젯밤에 영화를 다시 봤다. 


주차단속요원으로 이제 막 직장인이 된 다림이가 정원에게 어느 날 묻는다. 

-아저씨는 사는 게 재밌어요?


사회인이 되는 것은 재미없는 일을 수행하는 책임감으로 무장해서 관성을 만들어가는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잠깐 마주치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생각나는 한 사람이 생기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람에 대해 혼자 상상하면서 서서히 감정을 키우고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겪는다. 가령 더운 날 하드를 같이 먹는다든가, 지나가다 마주치면 얼굴에 뭐 묻은 건 없나, 한 번 거울을 본다. 이런 행동 속에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감정이 달라붙어서 진뜩해진다. 실체를 도통 알 수 없는 진득한 감정은 일상에 가끔, 그러다 자주 돌을 던져 파장을 만든다. 일상은 흘러가지만 감정은 그 파장에 흔들려서 고통스럽지만, 지나고 나면 아름다웠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영화를 다시 보니 다림이에게 감정이 감정이 이입된다. 


내 이십 대 초반에는 핸드폰이 없었던 삐삐의 시절이었다. 나는 삐삐가 싫었다. 상대에게 삐삐를 보내면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약속을 해도 둘 중 한 사람이 제 시간에 안 오면 못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상대가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나는 5분만 기다리다 약속 장소를 바람처럼 떠나곤 하는 심통을 부리곤 했다. 상대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다림은 나를 몹시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기다림'은 3막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서막에서 배우인 나는 시계를 보고 그가 늦는 시간을 계산하다. 제1막은 일련의 가정을 기반으로 한 걱정으로 기다림의 고뇌 단계이다. 제2막은 분노의  막이다. 부재하는 사람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단계이다. 제3막은 버려짐의 고뇌의 단계로 아주 순수한 고뇌에 이른다. 부재하는 사람은 죽음의 단계에 이르며 장례를 치룬다. 


어린 시절 기다림 연극에서 나는 항상 서막에서 퇴장하곤 했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른다. 지금도 내 감정을 주는 사람과의 기다림에서 나는 서막에서 주로 퇴장해 버려 관계가 쉽게 좌초되어 깨진다. 그 순간에 나도 내 감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 이성을 향한 사랑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일이, 내 경우로 넘어오면 책 속에서 주워 모은 모든 주옥같은 문장들이 한없이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문장들로 남을 뿐이다. 감정의 그물에 걸린 먹이가 되어버린 낯선 나를 여러 번 만났다. 


이십 대에는 내가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박진감 있게(?) 살았기 때문에 다림이와 정원이 잔잔하게 사랑하다 헤어진 이야기를 영화로 바라봤다. 영화 언어적 측면에서 주로 감탄했다. 감정선을 깔끔한 화면 전환으로 처리하는 것에 매혹되었다. 첫사랑은 꽤 오래 만났지만 첫사랑인 줄도 모른 채 헤어졌다. 그 후  다른 사람을 만나고 연애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 후에야 비로소 앞선 사랑이 진짜 첫사랑인지 알게 되었다. 정원의 내레이션 중에 "사랑도 추억이 된다"는 말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나이에 이르렀다. 어젯밤에 이 영화를 보면서 펑펑 눈물을 쏟았고 잘 때까지 울었다. 느닷없는 감성 폭발에 나도 당황스럽-.-; 정원과 다림이가 헤어질 거라는 결말을 알고 있기에 다림이가 수줍고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정원의 주위를 맴돌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하는 풋풋한 새내기 다림이는 주차단속을 하고 월급을 받는 규칙적인 일에 청춘을 바칠 것이다. 정원은 다림이가 겪게 될 과정을 이미 거쳐 변두리 허름한 사진관을 지키고 있는 '아저씨'가 되었다. 정원이 다림이가 자신에게 자라는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 이기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가 다림이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보통 연인들처럼 일상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다림이가  알았다면 어땠을까. 다림이는 불 꺼진 사진관을 배회하며 '기다림'을 주제로 하는 일인극을 하는 대신 병원으로 정원을 찾아갔을 것이다. 정원이 침묵해서 다림이가 '기다림'의 연극을 한 것이 정원이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결과일까. 정원이 침묵 대신 사실을 말했다면 다림이는 정원이 죽은 후에 애도 단계에 이르지 못하지 않았을까. 애도를 못한 사랑은 고통으로 남아 평생 다림이를 따라다니지 않았을까. 정원은 다림의 사랑을 현재 진행형으로 가슴에 간직한 채 숨을 거둔다. 정원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 즉 사랑받고 있는 순간에 죽었다. 다림이는 그동안 계속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었던 다림은 정원의 부재를, 롤랑 바르트식으로 해석하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극복하는 애도에 이르렀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이미지 없이도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단계에 이른다. 이루어지지 못한 스쳐간 사랑의 기억은 나이들수록 메말라가는 정서에 주는 선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일 년 만에 훌쩍 자란(실은 사회 물을 먹은) 다림이는 사진관에 '출장 중'이라고 걸린 표시를 보고 씨익 웃으며 갈 길을 간다. 내가 이 영화를 다림이의 성장 서사로 보는 이유이다. 


다림이는 정원을 다시는 못 만나겠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면 정원이가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다림이가 가졌던 전전긍긍했던 마음의 파장은 다림이의 인생을 무지개색으로 칠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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