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모로코의 서쪽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 에싸우이라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하미드가 불쑥 말을 걸었다.
-너 얼굴에 너무 경계심이 많아, 릴랙스 해.
-내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어? 내 표정이 그렇다면 여행 오기 전에 안 좋은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래.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모로코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들 책임이지 모로코인들 탓이 아니야.
하미드의 말에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여행자로서 낯선 도시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피부를 뚫고 얼굴 전체에 퍼진 걸 몰랐다. 하미드는 그의 가게로 초대했다. 잠시 망설였다. 그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혼자 여행하면 늘 딜레마에 빠진다. 종종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의 호의에 응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별난 사건과 사고가 전 세계에 퍼지는 요즘,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마음을 믿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진짜 여행은 자연과 도시가 이루는 풍경만 볼 때가 아니다. 그 도시를 이루며 사는 사람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진짜 여행자가 된다.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진짜 여행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하미드 뒤를 따라갔다. 골목에 있는 그의 가게 입구는 흰색 아치 모양이고 문이 없었다. 주력 상품이 뭔지 알 수 없는, 잡동사니로 가득한 가게였다. 문이 없는 가게가 있는 도시, 문이 있는 가게에서도 주인장이 자리를 비울 때면 잠그지 않는 나라가 모로코였다. 도둑이 없다는 말이었다. 잔뜩 품었던 내 경계심의 실체는 무엇일까?
하미드는 모로코의 국민 차인 민트 티를 내주었다. 가공하지 않은 민트 허브 큰 가지를 그대로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치약 맛이 강하지만,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익숙해진다. 민트 티를 먹을지 말 지, 또 고민했다. 대접한 차를 홀대하는 것은 손님의 도리가 아니라 입술만 축이며 마시는 척했다. 하미드는 자꾸 얼른 차를 마실 것을 권했지만, 하미드를 믿고 차를 목구멍 뒤로 넘기는 건 다음 생에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을 주고받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에서 결혼해서 살다가 이혼 후 고향에 정착했다. 7살 난 '보물'인 아들이 있다고 했다. 물담배를 피우며 내게 물담배를 건넸다. 몇 년간 청소한 지 안 한지도 알 수 없는 물담배 마우스피스를 선뜻 입에 물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말은 하지 않고 거절했다. 나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행자 자질은 거기까지인 걸로.
그에게 모로코 음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자 '에싸우이라 뮤직 페스티벌'을 알려줬다. CD까지 들려주며 여러 음악을 알려주었다. 하미드가 알려준 가수 중 수아드 마시Souad Massi가 있다. 알제리 출신의 여자 가수이다. 프랑스어로도 노래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로 노래할 때, 더 구슬프다. 음색이 애잔하고, 뜻은 전혀 모르지만 아랍어의 억양만으로도 애절함이 세포에 와닿는다. '음악은 세계 공통어'란 말은 참인 명제이다.
음악에 대한 내 소심한 관심에 그의 열정이 활활 타올라 한 시간 가량 '하미드가 알려주는 세계음악 시간'이 되었다. 그만 하미드와 헤어지고 싶어서 페즈로 돌아갈 버스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했다. 하미드는 또 내 뒤통수를 치는 말을 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페즈로 돌아야 해. 내일 일정이 있어서.
-계획은 깨라고 있는 거야. 여행에서 계획을 바꾸지 못할 게 뭐가 있어?
-내 짐과 돈이 모두 페즈 호텔에 있거든.
하미드가 내 마음 자락을 붙잡았지만, 나는 쫄보였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내 손에는 그가 준 목걸이와 나중에 알고 봤더니 5배는 비싸게 주고 산 CD 한 장이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하미드를 괘씸하게 여기고 분개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쫄보인 나에게 색다른 반나절을 선사해 준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미드가 아니었다면 수아드 마시도 몰랐을 것이다. 집에 돌아온 후에 한동안 수아드 마시의 음악만 들었다. 지금도 가끔 수아드 마시의 노래를 들으면 에싸우이라의 골목이 펼쳐지며 하미드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