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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Nov 21. 2021

통역이 필요해

“입맛이 없어.”     

엄마가 어느 순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시는 말이다. 매일 똑같은 말을 들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인정머리 없는 딸이 된다. 처음부터 무심하게 넘긴 건 아니다. 처음에는 스파게티 시킬까? 짜장면 시킬까? 피자 먹을까? 엄마가 좋아하시는 메뉴를 읊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음식을 드시면서도 “배고프니까 억지로 먹는 거야.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나는 엄마의 ‘심술(?)’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맛있으면 맛있다고 표현하는 말이 듣고 싶었다.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먼저 드시고 싶다고 말해주면 좋겠는데 스무고개 하는 것처럼 엄마의 까다로운 입맛을 살펴야 한다. 엄마가 하시는 말씀은 해가 거듭될수록 해석하기 어렵다. 모녀 사이로 지낸 지도 오십 년이 넘었지만, 엄마의 언어는 깊이 파고들수록 해독하기 까다로운 외국어 같다. 

   


얼마 전 후배에게 엄마의 언어 세계를 이야기했다. 후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나를 보았다. “언니 이과예요?” 후배는 엄마의 말을 번역해주었다.      


입맛이 없어. ->맛있는 걸 좀 찾아서 대령해 봐.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야.->나도 뭐가 먹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먹고 싶은 걸 찾아서 가져와.    

나한테 신경 쓰는 것도 불편해-> 나는 지금 관심이 필요해.      


후배는 동시통역도 가능하다면서 엄마의 언어를 줄줄이 해석했다.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나는 정말 몰랐다. 나는 그저 일상적 일에 대한 엄마의 부정적 표현을 듣는 것이 거북했다. 드시고 싶은 것을 말하는 일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고 되뇌었다. 


요즘 오은영 박사의 <금쪽같은 내 새끼>를 즐겨보고 있다. 아이도 없는 내가 이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은영 박사는 곤란하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바라보고 공감한다. 화 또는 공격적 행동은 마음이 아프다고 내보내는 신호라고 한다. 먼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본 후에 해석하는 법을 알려준다.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말에 귀를 쫑긋했다. 긍정적 감정은 물론이고 부정적 감정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려면 어른인 부모가 먼저 감정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부모 대부분이 감정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표현하는 법은 더더욱 모른다. 아이들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엄마와 나 사이에 벌어진 틈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고, 표현하는 법은 더욱 모른다. 왜 감정 표현하는 법을 모른 채 성인이 되었을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 세대와 다른 분위기에 컸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부모님 덕분이다. 하지만 엄마는 남녀 성차별이 노골적인 시대를 관통했다. 엄마는 원하는 바가 언제나 좌절되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가 생각을 말하면, 부모님(특히 외할머니)이나 오빠들한테 학대나 다름없는 폭언을 듣고 자랐다. 엄마는 끊임없는 욕구 좌절로 마음에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깊고 검은 구멍이 생겼다. 나는 이 구멍의 깊이를 짐작만 할 뿐 진짜로 알지 못한다.   

   

이제 시대도 달라지고, 상황도 달라졌다. 엄마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이다. 하지만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으시다. 자유로운 상황을 오히려 불편해하시고 어쩔 줄 몰라 익숙한 방법으로 반응하시는 것 같다.      


나는 엄마의 고단했던 시간을 헤아리기보다 엄마가 말씀하실 때마다 문제를 제기한다고 보곤 한다. 그러니 자꾸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 앞선다. 엄마가 불편한 마음을 당신 방식으로 전할 때마다 나는 해결사가 되려고 했다. 엄마와 나 사이에 ‘난기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내가 엄마를 편하게 대하지 못하고, 엄마도 점점 나를 불편해하신다. 엄마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엄마도 모르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하는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다른 시대를 사는 두 사람의 눈높이가 같아지는 일은 만만치 않다. 특히 가까운 가족의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소홀하기 쉽다. 애착으로 묶인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 안 해도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 내지는 기대를 품는다. 가까운 관계가 더 어려운 이유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마음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말 안 해도 알아주기를 바라곤 한다. 사람은 말 안 하면 모른다. 아무리 사소한 습관까지 꿰뚫고 있는 가까운 사이라도 말이다.      


엄마가 내게 바라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마음 기댈 곳 없는 허전함을 에둘러 말하는 방식일 터이다. 알았으면 해결사 노릇을 그만두고, 엄마의 언어 세계에 맞는 공감을 건네야 한다. 하지만 엄마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이번 생에서 가능할지 자신이 없다. 다정하게 말 안 해도 내가 엄마에게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 같다. 엄마에게 내 마음을 통역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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