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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Aug 15. 2022

AI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

한 달에 한 번, 동네 도서관에서 하는 독서 모임에 간다. 걷기에 조금 먼 거리지만 점점 사라지는 아날로그 냄새가 스민 동네이다. 골목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골목을 기웃거리는 맛이 있다. 비정형으로 이루어진 골목이라 종종 길을 잃는다. 일 년도 넘게 다녔지만, 나는 지독한 길치라 매번 비슷한 곳에서 헤맨다. 그때마다 지도 앱을 켜서 도움을 받는다. 네모반듯하게 닦인 길과 다르게 골목마다 폭도 다르고, 생김새도 달라 골목에 표정이 있다. 이 표정을 관찰하며 걷는다. 머리 위에는 전선이 엉켜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동네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교수, 스튜어트 러셀이 쓴 《어떻게 인간과 공존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것인가》를 함께 읽는 날이었다. 아날로그 향이 스며있는 동네가 주는 기쁨을 몰아내는 주제였다.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은 “AI 시대가 펼쳐지는데 너무 몰라서 두려워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좀 알고 싶어요.”라고 추천 이유를 말했다.

“왜 두려우세요?” 내가 물었다. 

“아이들이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살 텐데 그 환경이 어떨지, 바뀐 환경에서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의 대답이었다.      


그의 말에서 자식이 살아갈 환경을 부모로서 알아야 하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부모가 몰라서 알려줄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걱정과 불안처럼 여겨졌다. AI가 공존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자식의 미래와 관련 있었다. AI가 일상에 깊숙이 들어오면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낯선 세상에서 아이가 맞이할 미래를 어떻게 끌어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AI가 있는 미래는 나에게도 올 것이다. 자식이 있는 사람에게 미래는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라면, 나에게 미래는 내 인지력이 쇠퇴해서 학습 능력이 사라질 시간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19의 습격으로 우리는 비대면 시대를 살아내며 관통하고 있다. 마스크를 언제 벗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마스크 벗는 날을 과연 맞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비대면으로 디지털화는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 경우에는 강의를 줌, 웹엑스, 리모트미팅 등으로 했다. 처음에 원격 강의도 낯설고, 비대면 회의 툴 사용법도 서툴러서 긴장했다. 


처음 비대면 강의를 했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강의 중에 가출 혼은 강의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 화면으로 수강생이 보였지만, 교안을 띄우면 수강생들의 얼굴을 사라지고, 나는 교안을 보고 말해야 했다. 마치 벽을 보고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아서 강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두 시간 동안 번뇌가 휘몰아쳤다. 작은 화면으로는 수강생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일이 어떤 기분인지, 겪어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뜻밖에도 그 순간에 ‘믿음’이 필요했다. 모니터 너머에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 나를 구원했다. 


아무튼 블랙홀에 빨려 드는 것 같은 내적 소동을 겪은 후 적응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니까 이제는 비대면 강의도 익숙해졌지만, 가끔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비대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기 사용하는 법을 배울 정도의 인지력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중얼거리곤 한다. 더 나이 들어서 디지털 시대를 살아내려면 지금보다 훨씬 버거울 테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은행 업무나 주식을 사고파는 일은 이제 스마트폰 앱에서 다 이루어진다. 언제부터인지 동네에 있던 은행 지점들이 문을 닫고, ATM만 남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은행에 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세금도 전자우편으로 받고, 모바일 세금 앱에 접속해서 카드로 결제한다. 실물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은 가상 세계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세금 마감 날에 은행에 가서 줄 섰던 풍경은 더는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모든 영역에 디지털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시대에 흐름을 한 번 놓치면 따라가기 버거울 것 같아서 섬뜩할 때가 있다.   

   

이로운 기계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기계이다. 세탁기, 냉장고, 물걸레 로봇청소기 등 우리의 수고를 덜어준다. 기기는 육체적 수고는 분명히 덜어주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수고를 요구한다. 가령 장애물을 피하는 능력을 내장한 물걸레 청소기는 직접 바닥을 밀고 다니는 수고를 대신해 준다. 대신에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치우는 수고를 요구한다. 식탁 의자를 뒤로 빼야 하고, 거실 탁자를 옮겨야 하며, 바닥에 놓여있는 체중계라든지, 널브러진 물건들을 치워야 제 역할을 하면서 신나게 왔다 갔다 한다. 바닥을 닦는 로봇 청소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건을 치웠다 제자리에 놓는 일을 해야 한다.      


아무리 똑똑한 AI가 우리 일상을 대신해도 우리에게도 할 일이 주어진다. 바로 매뉴얼을 숙지하는 것이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상용화되면 운전을 안 해도 되지만, 기기 조작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직접 운전하는 것은 내 시각, 청각 등의 감각과 핸들을 조작하는 운동 신경을 쓰는 일이라면 기기 조작은 각종 버튼의 사용법을 ‘기억’하는 일이다. 기억이라면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일 중 하나이다.      


다행스럽게도 AI의 기본 프로그램은 아직 인간의 능력에 한참 못 미친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능력을 소유했고, 현재 기술로 아무리 노력해도 AI는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를 우리 인간의 비합리성과 감정, 두 가지로 꼽는다. 중요한 선택을 하는 순간에 우리는 이성에 기대에 선택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과학자조차도 감정에 휘둘려 선택한다고 한다. 다만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 결정이었다고 믿을 뿐이다. 이렇게 감정은 어디로 튈지 몰라서 데이터로 만들기 어렵다.      


우리가 감정에 휘둘린다면, AI는 프로그램에 휘둘린다. 세팅된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면 작동하지 못한다. AI가 나아갈 최종 목표는 사람을 모방하는 것이다. 우리의 비합리적 선택이나 감정을, 과학자들은 인간의 '일탈'로 바라본다. 이 일탈을 데이터화해서 프로그램에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한다.      


내가 두려운 것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디지털 기술 사용법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AI를 대하는 내 두려움은 도구적 측면이 강하고, 직업적으로 내 일을 AI가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걱정은 희미하다. AI가 내 일을 대체할 정도로 발전하면 나는 죽음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낙관론자이다. 미래는 모두에게 추상적이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른 것 같다. 부모라면 많은 직업군을 AI가 대체하는 시대에 아이가 어떤 환경을 맞이하고,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살아남을지 고민한다면, 나는 내 두 발로 걷지 못하고, 인지력조차 사라질 노화를 상상한다. 


간병 로봇이 개발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움직이지 못한 채 숨만 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두 발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밥맛을 느낄 미각이 있어야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치매에 걸린 노부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무르>가 있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남편이 돌본다. 숟가락 드는 것조차 잊어버린 아내에게 남편은 매 끼니 밥을 먹인다. 간병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가 아닐까. 노부부 사이에는 함께 보냈던 시간이 있다. 남편은 단순한 간병인이 아니라 과거 단아하고 명민했던 아내 모습을 기억하는 반려자이다. 함께 보낸 시간이 없는 간병인은 보살필 환자로만 대한다. 사람도 이런데 간병 로봇은 어쩌면 아주 적은 부분밖에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로봇 물걸레 청소기처럼.      


내가 눈을 감은 후에 세상을 굳이 상상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펼쳐질 미래를 가끔 떠올린다. 기력도 총명함도 빛이 바랠 미래는,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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