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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Oct 19. 2022

리스본의 내면 여행가, 페르난두 페소아

우리 안에 존재하는 풍경이 바로 세상의 풍경이다. 그래서 나는 상상으로 풍경을 만들어낸다. 내가 만들어내면 풍경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풍경이 있으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풍경을 보고 감상한다. 그러니 여행이 왜 필요한가? (불안의 서, 474)      


내가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 가는데 그토록 진심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페소아의 말대로라면 내 안에서 풍경을 만드는 상상력이 없는 탓이 아닐까? 나에게 여행은 나를 둘러싼 현재 풍경을 지우고 새로운 풍경으로 달아나는 행위였다.      


지리멸렬한 밥벌이에서 잠시라도 멀어지려고 마음, 시간, 돈을 쏟았다. 여기에는 ‘다른’ 나로 태어나려는 터무니없는 환상이 작용했다. 잦은 도피로 달아남에 대한 열정이 점점 계발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비행기 탈 생각만 하면 마음이 가벼웠다. 다른 나를 만날 상상으로 들떠서 일상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다.    

  

출입국신고서 직업란에 ‘싱어송라이터’라고 쓸 때 모세혈관에 퍼지는 쾌감을 떠올렸다. 어릴 때 ‘장래 희망’ 란에 무엇을 적든 다 이해받는다. 대통령, 유튜버, 선생님, 마트 주인 등 무슨 직업이든 실제 무게감은 없는 ‘희망’ 일뿐이니 수용된다. 고작 내가 만들어낸 '다른 나'는 직업란에 다음 생에 되고 싶은 직업을 적는 것이었다. 누군가 알아채고 비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없진 않지만, 출입국신고서 직업란에 쓴 거짓말은 장래 희망처럼 재기 발랄하지만 구속력이 없다.      


많은 일이 눈에 띄는 동기도, 이유도 없이 일어난다. 오히려 상황에 적응하려는 순발력과 즉흥성에 따라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가 종종 있다. 리스본행도 그랬다. 휴가가 주어졌고, 동행을 구하기도 어려우니 혼자 떠날 결심을 했다. 그러다 보니 안전할 것, 초겨울이라 햇볕이 풍부하고 따뜻한 도시를 물색했다. 리스본은 이 두 가지 조건에 찰떡인 도시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도시 자체에 대한 관심을 오롯이 충전하지는 못했다.

     

리스본이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도시인 것을, 집에 돌아온 후에야 알게 되었다. 리스본에 있을 때 내가 채집한 페소아의 흔적은 달랑 사진 한 장이었다. 아줄레주 뮤지엄에서 타일에 신문을 읽고 있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누구인지 몰랐지만 마음을 끌었다.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였다. 나중에 페소아의 <불안의 서>을 찾아 읽었고, 그의 중얼거림은 곧 내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페소아의 부름으로 직접 보았지만, 모르는 리스본으로 달려가곤 했다. 페소아는 ‘내면 여행가’이자 ‘자아 여행가’였다. 작가가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책을 출간하면 필명이나 가명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페소아는 가명이나 필명이 아니라 ‘이명’을 사용했다. 사용한 이명은 80개가 넘는다. 이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름마다 성격, 기질, 세계관 등을 부여해서 다른 인물을 창조했고, 그 이름으로 작품을 썼다. 한 사람의 정신세계의 깊이가 한정되기 쉬워 작품 경향도 비슷하기 마련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페소아는 보여준다.  

    

페소아는 자신이 창조한 다른 인물을 통해 포르투갈어, 영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로, 그리고 다른 문체로 시, 소설, 평론, 일기 등을 썼다. 관심 영역도 다양해서 점성술학 연구에도 많은 시간을 보낸 이명(Raphael Baldaya)도 만들었다.   

   

이들 모두 페소아의 일부지만 한편으로는 페소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자신이 쓴 문학 작품에 대해 서로 논쟁하고 토론했다. 페소아는 자기 안에 사는 다양한 기질을 끌어내서 허구의 인물이지만, 진짜 개성을 가진 인물을 창조했다. 그는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18세에 리스본으로 혼자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리스본을 떠난 적 없었다. 죽을 때까지 같은 도시에 살면서 다양한 세계를 여행했다. 그가 사는 방법이었다.      


내가 상상하는 것을, 나는 눈앞에서 본다. 여행을 떠나면 그것과 무슨 차이가 생긴단 말인가? 상상력이 끔찍하게 빈곤한 경우에나 실제로 뭔가를 느끼기 위해 장소의 이동이 필요한 법이다. (747, 텍스트 451)   

  

나처럼 다른 도시로 날아가는 사람을 한낱 엉덩이만 가벼운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말이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리스본 거리를 내 두 발로 직접 걸었을 때보다 페소아를 통해 리스본의 거리와 사람들을 더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페소아는 자신의 방에서 사무실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쌓았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과 대화했다. 그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전지전능한 창조자였고, 관찰자이며 내면 여행 고수였다. 다른 세계로 여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여행은 무엇이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든 석양은 다 같은 석양이다. 석양을 보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필요는 없다. 여행이 주는 해방감이라고? 그런 해방감은 리스본에서 교외인 벤피카로만 나가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리스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행자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왜냐하면 해방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디로 가도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의 서>, p.251     



<불안의 서>를 쓴 이명 수아레스는 낮에는 회계장부 속 숫자 세계에서 살았지만,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일상 바깥으로 여행했다.      


여행? 존재 자체가 이미 여행이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몸이라는 운명의 기차를 타고 이 역에서 저 역으로 향한다. 혹은 거리와 광장에서 사람들의 얼굴에서 얼굴로 여행한다. 마치 차창 밖의 풍경처럼 항상 똑같으면서 항상 다르기도 한 그것들을 바라본다. (불안의 서, 747, 텍스트 451)     


수아레스의 글은 깃털처럼 가벼운 엉덩이와 마음을 가진 나를 비웃는다. 리스본에 다녀왔지만, 결코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 카페 브라질레리아 앞에 있는 페소아의 동상을 보고도 모른 채 지나쳤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지하에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지만, 모른 채 에그 타르트에나 집착했다. 수도원 회랑을 직접 걸었지만, 여행했다고 할 수 있을까?      


페소아를 알고는 리스본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말하기 쑥스럽다. 지금 리스본은 나에게 전혀 가 본 적 없는 환상의 도시가 되었다. 도시를 온 마음으로 겪은 페소아의 몽상 덕분이다.      


페소아의 글은 내 자리에서 일상 여행을 하는 법을 알려주어서 여행을 떠날 수 없을 때 위안이 된다. 그는 진정한 일상 여행가였다. 사무실 앞 담배 가게에서 일어난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앞에서 양복을 입고 걸어가는 사람의 어깨에서도 감각을 이용해서 동물적 천진함을 떠올렸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도 떠남과 돌아옴을 떠올렸다.      


아줄레주 뮤지엄까지 걸으면서 스친 골목이 어쩌면 페소아의 리스본에 가장 가까운 게 아닐까. 창밖을 내다보던 노인, 콘서트를 알리는 포스터 위에 다른 콘서트를 알리는 포스터가 겹겹이 붙어있는 벽 사진을 보며 리스본 골목을 걷는 꿈을 꾼다.  일상 여행가 페소아를 따라 상상 속에서 여행하며 시간을 호사스럽게 보내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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