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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May 22. 2024

젊음과 쿨하게 작별하기 <위아영>

어느 날 아침,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주름이 눌러앉은 눈가와 미간을 한참 봤다. ‘언제 이렇게 주름이 생겼지?’ 며칠 동안 거울을 볼 때마다 주름이 거슬려서 동네 피부과에 가서 상담했다. 의사는 단호하지만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표정 주름을 없애려면 보톡스밖에 없어요.” 살다 보면 가끔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무슨 배짱인지 보톡스를 맞기로 했다.


눈가와 미간 주름이 흔적도 없이 펴지는 신세계였다. 대신 웃을 때, 보이지 않는 끈이 눈가를 잡아당기는 느낌과 친해져야 했다. 신기해서 거울을 자꾸 들여다보니 이번에는 이마와 턱 주름이 보였다. ‘턱에도 원래 주름이 이렇게 많았나?’ 주름이 사라져 탱탱해진 눈가와 대비되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손으로 이마와 턱 주름을 잡아당기며 보톡스의 효과를 시뮬레이션하다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다 보톡스에 중독되겠네.’


우리는 모두 한때 젊다. 하지만 젊음의 절정일 땐 젊음을 모른다. 젊음이 떠난 후에야 젊음을 그리워한다. 젊음이 대체 무엇이길래. 우리가 붙잡고 싶은 젊음은 외모에 쏠려 있다. ‘동안이세요’라고 덕담을 주고받는다. 군살을 나잇살이라고 부르며 꼬집는다. 하루 종일 운동하고 식단 관리하는 사람에게 부지런하고 ‘젊게 산다’고 찬사를 보낸다. 젊음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을 젊게 산다고 착각한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에릭 와이너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진정한 나이 듦의 문화가 없다고 지적한다. 멋진 중년, 근사한 시니어라고 불리는 사람도 젊음에 ‘절박하게’ 매달리는 젊음의 문화만 있다고.      


중년이 되면 부정하고 싶어도 체력의 질이 변한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가 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고지혈증과 지방간 진단을 받고, 관절이 삐걱거린다. 벤 스틸러와 나오미 왓츠가 출연하는 영화 〈위아영〉은 40대 초반의 부부 조쉬와 코넬리아가 노화를 마주하고 좌충우돌하는 코미디로 노화를 어떻게 맞이할지 질문을 던진다.


부부는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오는 노화를 부정하고 젊음을 좇는다. 부부는 즉흥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청년 커플에게 홀딱 반한다. 청년은 관계든 상황이든 선입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때론 실패한다. 그렇게 실패도 하고 상처도 받으면서 다른 상황으로 나아간다. 서툴러도 또 시도하는 것은 청년의 특권일지 모른다. 조쉬와 코넬리아는 청년의 특권을 탐한다.


부부는 ‘회춘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청년 부부를 따라가서 힙합을 배우고,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고, 환각제를 먹고 자아를 만나는 독특한 의식에 참여한다. 청년처럼 옷을 입고, 청년들과 어울리며 청년 놀이와 활동에 참여한다. 청년의 겉모습을 모방해서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노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세상이 청년으로 가득할 테니. 힙한 옷을 입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힙합을 배우고, 자전거를 타고 난 후에 부부를 기다리는 것은 관절염 재발이다. 환각제를 복용하는 파티에서 자아를 만나고 온 다음 날에는 두통이 인사를 건넨다. 20대처럼 옷을 입고 20대가 사용하는 속어를 쓰며 놀고 난 후에야 자신들이 더는 20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뼛속까지 깨닫는다.      


몇 년 전 요가원에서 가끔 마주쳤던 한 회원의 얼굴이 가끔 떠오른다. 표정은 50이 훌쩍 넘어 보이지만, 다림질한 것처럼 주름을 빳빳하게 편 피부였다. 표정에 어울리는 주름이 없으니 어색했다. 그녀는 화려한 네일에 나이 든 표정과 이질적인 최신 유행하는 코트를 걸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젊음을 모방한 옷차림이었지만 이상하게 젊음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돈을 잔뜩 들인 생색만 났다. 표정도 나이를 먹는다. ‘자본으로 이룬 젊음’은 표정에 생기까지 불어넣진 못했다.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이 화난 표정이라 그 기운이 묻을까 봐 멀리 떨어져 지나가곤 했다.


얼굴 주름과 달리 생각과 사고에 자리 잡은 주름은 주의를 기울여야 보인다. 중년 조쉬는 청년 제이미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는 새로운 방법에 반기를 든다. 모두가 새롭다고 관심을 보이지만, 조쉬는 탐탁지 않다. 그가 알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쉬는 청년의 아이디어를 맹렬히 비판한다. 건설적인 비판이 아니라 자기 경험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결국 한물간 다큐멘터리 감독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청년 감독에게 질투하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한때 내가 믿고 따르던 직업윤리나 기준도 시대가 바뀌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 손에 움켜쥐었던 가치를 내려놓지 못하면 발광하는 중년으로 추락하고 만다. 진짜 젊음은 외모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수용하는 유연성에서 나온다. 정신도 나이가 듦을 인정하고 새로운 정신적 가치와 악수할 줄 아는 사람이 젊게 사는 게 아닐까.


타인의 조언에 노여워하기 전에, 내가 알던 방식을 큰 소리로 주장하기 전에,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이 진짜 멋진 중년이다. 젊음은 새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능력이니까. 자기 가치관과 신념이 곧 법이 되면 말 안 통하는 고집 센 노인 당첨이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을 쫓아내고 외로운 노년을 보내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고 경험한 것이 절대값이라고 주장하면, 아무리 동안일지라도 젊다고 할 수 없다.      


서울의 한 노인복지관에서 여행 인문학을 강의한 적이 있다. 개강 첫날 1층 로비에 들어서니 헬스장이 보였는데, 7090 이용자들로 붐볐다. 어르신들의 활기로 넘쳐 바깥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강의실이 있는 3층 복도에는 포켓볼 당구대 2대가 있었다. 남녀 어르신들이 그곳에 삼삼오오 포켓볼을 치고 있었다. 어깨가 굽고 움직임이 느릿느릿하지만, 당구대 주변에 큐대를 들고 모여 있었다. 창가에는 이들을 구경하는 어르신들이 앉아 있었다. 그때의 나는 노인을 무기력과 동의어로 보았던 것 같다.


수강생이 한 분 두 분 강의실로 들어오셨다. 몇몇 어르신들이 모여 툭툭 나누는 말들로 강의실이 웅성거렸다. “위암으로 수술한 후 2년 동안 집에만 있었는데 이러다 폐인이 될 거 같아서 복지관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내가 팔십에 큰 수술을 해서 죽는다고 했는데 살아났어.” 중요한 비밀을 누가 들을까 봐 소곤거리셨다.


‘이러다 폐인’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이 말은 청년, 적어도 중년의 입에서 흔히 나오는 말 아닌가. 이제 칠순인 어르신이 무언가를 배우고, 자신을 탐색하며 자립하는 삶을 꾸리려는 태도를, 그전까지 나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어르신의 꼿꼿한 정신에서 주름 대신 젊음이 보였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호기심, 배움에 대한 욕구는 젊음의 짝꿍이다. 우리는 신체 노화를 늦추는 데는 적극적이지만, 정신적 젊음을 가꾸는 데는 상대적으로 게으르다. 주름의 깊이, 근육의 강도 등으로 신체적 젊음을 측정하듯이 정신적 젊음도 수치로 측정할 수 있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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