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알 Sep 05. 2020

어서 말을 해, 테헤레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 리뷰 




남녀의 사랑과 구애는 모든 예술작품의 최애 주제이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단어를 보고 사람마다 떠올리는 감정이 다르다. 누가 어떤 식으로 묘사했는지에 따라 주는 감정도 다르다. 사람의 감정은 우주처럼 광활하고 깊이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손에 잡히지 않는 깊고 섬세한 감정을 거칠게 뭉뚱그린다. 언어는 때로는 위대하지만 때로는 그 한계로 한없이 초라하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지진이 난 이란의 한 작은 마을에서 영화 촬영이 이루어지면서 벌어지는 작은 소동을 담는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1994년 영화인데도 놀라운 지점이 있다. 대사를 하는 사람의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걸 우리는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카메라 밖에서 영화 촬영팀의 대사가 이어지고, 카메라 앵글 속에는 극 중 인물들이 들어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영화 촬영장에 있지만 촬영장 밖에서는 개인의 삶이 있다. 개인으로 삶은 이란의 남녀 차별, 계급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 속에 펼쳐져 있다. 


영화 속 남주인공 호세인은 촬영하면서 여주인공 테헤레에게 청혼을 하면서 구애하는 장면이 애절하게 담긴다. 호세인은 글도 모르는 벽돌공이었다. 집도 없고 돈도 없지만 진정성을 무기로 테헤레의 사랑을 구한다. 하지만 테헤레의 부모님이 지진으로 죽고, 할머니가 보호자인데 손녀의 남편으로 거절한다. 이유인즉, 글도 모르고 집도 없기 때문이다. 호세인은 자신이 글을 모르기 때문에 글을 아는 여자와 결혼해야 하고, 집이 없는 건 다 마찬가지로 열심히 잘 살 자신이 있다고 호소한다. 모두 비슷한 처지끼리 결혼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냐며 아주 적극적이다. 계급 전복을 꿈꾸는 이유는 타당하지만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게다가 자신에게 은밀한 눈빛을 주었던 테헤레는 눈빛을 보낸 이후 망부석처럼 굳어서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눈길 한번 안 준다. 영화 촬영장에서도 책만 보고 있는 테헤레에게 영화가 촬영 되는 카메라 밖에서 틈만 나면 자신이 남편감으로 얼마나 적절한지 역설한다. 


감정을 주로 드러내는 사람은 호세인이어서 호세인에게 감정이 몹시 이입된다. 테헤레가 호세인에게 한마디 해주길 고대하게 된다. 하지만 테헤레는 끝까지 한마디도 안 한다. 우리는 결말을 모른 채, 두 사람이 커다란 올리브 나무 사이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엔딩에서 마침내 호세인은 테헤레의 답을 듣고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데 우리는 그가 어떤 답을 받았는지 모른다. 


26년 전 보수적인 이란의 상황이지만 오늘날에도 호세인과 테헤레처럼 처지가 다른 청년의 사랑이 쉬운 것은 아니다. 호세인의 사랑을 응원하게 되지만 그의 마음을 거절하는 테헤레를 비난할 수도 없다. 영화 촬영 중에 결혼한 지 3일 된 남편이 아내에게 양말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장면이 반복해서 촬영된다. 호세인은 연기를 하면서 카메라 밖에서 끊임없이 테헤레에게 진심을 고백한다. 호세인은 영화 속 남자처럼 자기 할 일을 아내가 하길 바래서 결혼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테헤레가 호세인의 진심을 읽기를 바랐지만 시종일관 침묵하는 테헤레의 심정을 알 방법이 없다. 어른의 명령과 전통적 시선에 복종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 살고 있는 테헤레의 의도적 무관심을 자꾸 해석하게 된다. 테헤레 어서 말을 하라고!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그 선택은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최대한 안전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호세인이 애면글면 하는데 테헤레가 침묵하는 이유를 찾아봤다. 두 청춘을 탓하기 전에 그들이 속한 사회 규범의 보수성을 가늠하고 나아가 내가 속한 사회의 보수성을 들여다 본다. 영화의 결말을 열여두는 감독의 의도는중요한 선택을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지지하는지 살펴 보라고 하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의 파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