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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Sep 19. 2020

처절한 사랑 이야기

영화 <아무르> 리뷰


요즘 가족 관찰 예능 전성시대다. 부부 관찰 예능을 보면, 애정 전선을 유지하려고 부부 사이에 많은 이벤트가 이루어진다. 사랑을 보여주려면 오디세우스처럼 용감해서 장애를 극복하고, 사랑의 모험 중에도 상대 마음을 간파하는 독심술도 있어야 한다. 종교인이나 베풀 수 있는 터무니없는 자애와 배려를 연출하는 것을 봐 왔다. 우리는 예능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사랑의 행위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세뇌를 당한다. <아무르>는 이런 사랑의 개념을 뒤집는다.      


"설명하는 거 싫어하고 할리우드 영화가 제시하는 빠른 답안은 거짓이다. “ 영국의 일간지인 <가디언>지에 실린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말이다. 하네케 감독은 그의 작품들에서 사람의 정신적 폭력 기제의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는 데 집중한다. <아무르>는 프랑스어로 사랑이라는 뜻인데 사랑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이 어떻게 다루어질까 궁금했다. 달달한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사랑이다.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반려자에 할 수 있는 궁극의 배려를 다룬다. 감독 특유의 건조하고 군더더기 전혀 없는 서늘한 시선으로 노부부를 바라본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 안느에게 마비증세가 온다. 안느는 피아니스트였다. 자신의 일에서 단정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비가 온 후에는 식탁 앞에서 혼자 숟가락 드는 것조차도 힘들다. 대소변도 도움 없이는 힘든 상태이다. 딸은 엄마를 보고 마음 아파서 눈물을 보이지만 공감의 눈물이 아니라 과거 단정했던 엄마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분노이다. 딸은 부모가 겪고 있는 자잘하고 구질구질한 일상을 함께 버텨낼 인내심이 없다. 딸이 할 수 있는 말은 무기력한 현대 의학을 질책하는 것이었다. 안느의 남편 조르주는 자신이 엄마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딸한테 말한다. 밥때마다 밥을 안 먹겠다는 아내와 실랑이를 하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보낸다. 


딸과 조르주의 태도에서 두 사람이 안느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딸은 어머니를 환자로 인식하는 반면에, 조르주는 안느를 환자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 움직이기 불편한 식구, 그래서 단지 도움이 필요한 식구로 바라본다. 조르주도 노쇠해서 거동하기 불편해 보이지만 성심껏 안느를 돌본다. 남편이 아내를 돌보는 행동은 부부 공동체를 이루며 갖게 된 책임감, 사랑, 혹은 동시대를 살아온 동료로서의 연대감에서 나온다. 그는 누구보다도 안느를 잘 이해하고 공감한다. 안느가 점점 굳어가는 몸으로 숨을 쉬고, 남이 떠 넣어주는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연배이고 나이 드는 게 어떤 것인지 안다.      


두 사람을 아는 젊은이들은 육체가 늙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노인이 왜 변덕을 부리고, 갑자기 사나워지는지 모른 채, 늙음을 재앙으로 여긴다. 두 사람을 보러 딸과 사위, 안느의 제자, 그리고 두 간호사, 가사도우미가 집에 온다. 사위와 제자는 병문안을 와서 묻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요?     


이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 위로와 염려를 담은 말이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안느에게는 이 말은 날 선 비수가 된다. 안느는 "나이가 들면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몸이 마비되기도 하지."하고 쏘아붙인다. 안느를 도와주는 방문간호사도 마찬가지다. 간호사는 여러 직업 가운데 방문간호사가 되었다.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간호사는 그녀에게 일일 뿐이다. 환자를 돌보기로 약속한 시간을 채운 후에 받는 돈에 관심이 더 많다. 월급쟁이가 근무시간을 채우고 월급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간호사로서 사명감이 없다고 간호사를 비난할 수 없다. 감독은 이런 상황들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돈을 받으며 막말하는 간호사와 화난 조르주를 보여준다.      


아픈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구별을 짓기부터 한다. 아픈 사람은 하루아침에 약자가 돼서 비정상 취급을 받고, 비정상이 되길 암묵적으로 강요받는다. 아픈 사람은 육체적 병과 타자화되는 정신적 폭력을 다 감당해야 한다.      


이 영화는 감독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감독이 유달리 애정 했던 숙모가 아팠고, 감독은 숙모의 투병을 지켜봤다. 숙모는 ‘나를 제발 죽게 해 줘.’라고 했다고 한다. 안느와 조르주,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죽음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두 사람은 병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체의 노화를 비정상으로 바라보고 구별 짓는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뿐이다. 조르주는 이런 상황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실행했다.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이 보다 처절한 사랑 이야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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