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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이 Jun 28. 2018

휴지의 노래

가장 하찮은 존재가 되어 노래 부르네



-단막극 휴지-

(마름모꼴의 휴지가 팔랑거리며 무대로 등장한다. 조명 서서히 밝아진다)

휴지: 맞아요, 여러분은 제가 어떻게 서 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실 서 있는 게 아니라 떠 있는 것에 가깝죠. 저는 정말 가볍습니다. 

(무대 왼쪽에서 한 남자가 들어와 앉아 각 휴지에서 휴지를 뽑아내 던진다)

휴지: 너무도 가벼워서, 여러분은 저와의 만남이 어땠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무대 왼편에서 한 여자가 들어와 남자가 뽑아준 휴지를 뭉쳐 던진다)

휴지: (속닥속닥) 저는 가벼운 데다 심지어 작으니까.

무대 밖 목소리: 야! 휴지 좀 줘봐!

휴지: (작게 한숨)저 여기 있어요.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갈 수 없죠. 당신이 집어 가야 해요. 당신에게 갈 수 없어요. (밝은 표정으로) 그건... 산이나 바다처럼 크고 무거운 것도 마찬가지죠!

무대 밖 목소리: (큰 소리로 재채기)

(휴지가 재채기 소리에 옆으로 날려간다. 휴지의 표정 어두워진다.)

휴지: 에휴...(잠깐 생각하다) 제가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옛날 옛날에... 

해가 처음으로 태어나고, 그다음에 달이 태어났습니다. 해는 너무도 찬란해서 사람들의 신이 되었고, 달은 해만큼 찬란하지도, 아름답지도, 크지도 않아서

(휴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휴지: 사람들의 노래가 되었답니다.

휴지: (꿈결같이) 노래... 가벼운 것들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것이죠. 노래... (양 모서리를 손처럼 모으며 간절하게) 저도 노래가 될 수 있을까요? 크고 무거운 것들이 되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저는 휴지니까요. 하지만... 저도 노래가 될 수 있을까요?

(조명이 점점 어두워진다)

휴지: 노래, 누군가 불러줄 노래.

(암전 될 때까지 휴지는 노래처럼 중얼거린다.)


제가 너무 작고 가벼운 존재여도, 그래서 아무도 저와의 만남을 기억 못해도 저는 꿈꿉니다.

노래가 되어 여러분 사이에 맴돌 수 있는 날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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