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는 얼마입니까?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배가 고파 초콜릿을 우걱우걱 씹으면서 운전하고 있는데 자동차도 배가 고프다고 연료 경고등이 깜빡거렸다. 집 가는 경로에 있는 주유소는 1700원대, 조금만 돌아가면 1600원대. 핸들을 돌렸다. 10분 정도 추가 시간을 예상했지만 30분 뒤에 집에 도착했다. 퇴근 시간이라 차도 막히고 처음 가는 경로라 길도 잃고, 이래저래 수난시대였다. 그래도 40L 정도 주유했으니 4,000원 아낀 건가? 뿌듯한 맘으로 고생한 나에게 마늘빵과 닭꼬치를 사줬다. (뿌듯하면 집에서 밥을 먹었어야지!)
수난시대에 배가 더 고파져 빵까지 사 먹으니 8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다. 7시 반과 8시 반의 차이가 이리도 컸던가? 오늘은 몇 달 동안 안 나갔던 골프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었지만 지금 갔다 오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라고 쓰고 배부른 핑계라 읽는다). 시간이 촉박한 느낌이 들어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TV를 켰다. 골프 중계를 하고 있었다. 2년 전쯤 두바이에서 오늘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게 기억났다.
두바이는 기름, 자동차 빼고 결코 싸지 않은 나라다. 매 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만 해도 한국에서 한 달 식비는 가능하다. 와이파이 10만 원, 휴대폰 10만 원, 전기 수도세 10만 원. 푸드코트는 여의도 식당 물가 정도고, 제대로 된 식당에서 외식을 할 경우 돈 생각 안 하고 맘 편히 먹을 마음으로 가야 한다. 여기에 단연코 가장 큰 지출인 백만 원 단위의 월세까지.
이렇다 보니 두바이 살기 초반에는 물가에 적응이 안돼 자연스럽게 외식도 줄이고, 가계부도 쓰기 시작했다. 장을 보러 가면 1 디르함 (330원 정도)이라도 더 싼 게 있나 찾아보게 됐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지출 줄이기에 몰두했다.
어느 날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장을 보고 몸도 뇌도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겨우 한 봉지 장보기에 2시간이나 썼다. 원산지 기준이 아닌 몇 디람 더 싸서 골랐던 것 같은 기억나지 않는 커피를 내리고 베란다에 앉았다. 하늘은 너무 예뻤고, 눈앞에 보이는 마리나베이와 저 멀리 JBR 해변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서 살고 있음에 감사하며 순간 벅차올랐다. 몇 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렇게 벌써 하루가 끝나는구나. 너무 아쉬웠다.
당근, 오이, 커피 가격은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계산하더니 ‘그래, 얼마 모았니?’ 이것저것 따져보며 아낀 돈은 채 만원도 안될 텐데, 나의 2시간이 만 원짜리였나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 시간 동안 이 베란다에 앉아 두바이 사람 구경이라도 했다면? 비싼 월세에 포함된 1층 수영장이라도 갔다면? (특별한 건물이 아니라 두바이는 더워서 사람이 사는 거의 모든 콘도 아파트에 수영장이 있다.)
그날 나는 망치로 한 대 맞고, 가격보다 가치를 찾아 골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사막의 땅 두바이에서 초록색 들판을 볼 수 있는 것은 중요했다. 레슨비와 장비비 등 가격을 생각하면 시작할 수 없었지만 364.5일 비가 오지 않는 나라, 집에서 차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골프장, 이런 환경에서조차 골프를 하지 않으면 자연은 고사하고 앞으로 스크린 골프만 할 운명이었다.
그렇게 현명하게 선택을 했던 내가 오늘 골프 연습을 하는 걸 잊어버리고 주유 가격을 먼저 생각해 버렸다. 이런 날, 집에 와서 오랜만에 TV를 켰는데 그마저도 몇 안 나오는 채널에서 골프 중계를 하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수많은 산과 숲을 보다 보니 골프가 나에게 주는 가치가 사라진 것 같아 좀 아쉽다.)
결국 나는 골프 연습은 못 갔지만 글 쓰기의 가치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TV를 끄고 이 밤에 카페에서 5,000원짜리 디카페인 커피를 시키고 글을 쓰고 있다. 기록되는 이 글이 나와 누군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주길 바라며.
얼마입니까, How much is it?
vs
얼마입니까, How worth is it?
그나저나 정말 이럴 거면 왜 주유소를 검색한 거니~
온라인 쇼핑의 발달로 여전히 갓성비, 가성비를 비교 하며 시간을 아끼기도, 수많은 정보로 시간을 더 쓰기 도 하지만 두바이의 장보기 사건 후, 확실히 쇼핑하는 시간은 줄었다. 다만 가격보다 가치를 생각하다 보니 부 작용이 한 가지 생겼다. 때때로 순간적인 가치에 눈먼 돈을 쓰고 그런 나를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피부과와 미용실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에 슬로우 에 이징 키워드에 꽂혀 ‘젊음’과 ‘예쁨’의 가치에 푹 빠져버 렸다. 가성비 카페를 찾아다니면서, 몇 달 가는 피부 재 생 주사에는 백만 원이 넘는 금액을 생각 없이 결제하 고, 한 달 간격으로 컷을 했다가 펌을 풀었다가, 또 펌을 하려고 하는 나를 보며 ‘괜찮아, 가격보다 가치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좋은 작용도 있다. 부모님과의 식사나 친구의 생 일 때는 가격 상관없이 좋은 곳, 좋은 선물을 찾고는 하 는데, 이러한 소비 또한 사실 자기 합리화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가격보다 가치를 기반으로 결정하는 사람 이었다. 다만, 시간에 있어서는 그 가치를 여전히 과소평 가한다. 머리나 음식과는 반대로 오감으로 느껴질 수 없 는 시간 앞에서는 그것의 가치보다 눈에 보이는 단순한 가격을 선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시간을 오감화 시키면 될 것 같아 간 단하게 하루의 일정을 시간대별로 계획하기도 하고, 스 톱워치로 하루의 시간 트래킹도 해보았다. 물론 오래 가 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계획하고 트래킹한 날은 다른 날 보다 그것을 확실히 소중히 다루었다. 가치냐 가격이냐 고민할 시간에 떠나가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건 어 쩔 수 없기에, 시간이 눈에 보이게 시계부터 매일 차야 겠다 다짐하며 가성비 시계를 찾느라 또다시 시간을 보 내고 있는 내가 조금은 귀엽다.
하우 머치든, 하우 월스든, 시계부터 매일 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