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네 Nov 12. 2023

‘인터넷’ 해지 한 달 후기

생각은 해지가 안 되나요?

얼마 전 인터넷과 TV 약정이 만료되어 콜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사은품 및 여러 가지 재약정의 혜택은 솔깃했지만 핸드폰 데이터를 다 써 본 적도 없고, 집보다는 밖을 더 좋아하고, 보고 싶은 영상은 언제든지 핸드폰으로 볼 수 있었기에 고민 끝에 재약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덤으로 이번 기회에 적어도 집에서는 아날로그 삶을 한 번 살아보자 마음먹었다.



인터넷 해지 한 달 차, 생각보다 불편했고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었다.


1. 루틴을 잃었다. 아주 가끔이긴 했지만 스마트 TV로 요가를 틀고 아침을 시작했었는데 TV는 데이터 테더링이 안 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핸드폰으로도 요가를 틀 수 있었지만 최소한의 손가락 움직임으로 최대의 오락거리를 찾을 수 있기에 늘 더 재밌는 영상에 손이 먼저 갔고 요가는 저녁으로 미뤘다. 즉, 안 했다는 말.


2. 시력을 잃었다. 보고 싶은 긴 영상이 있으면 스마트폰을 TV와 미러링해 큰 화면으로 봤었는데 미러링이 와이파이를 타고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그냥 안 보면 되는 거였지만 참을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더 자주, 더 가까이 작은 스크린 속으로 내 눈을 갖다 대고 있었다.


3. 돈을 잃었다. 쇼핑몰을 둘러보듯 가끔 TV 채널들을 돌려보며 시간 때울 프로그램을 찾았었는데 기본으로 제공되는 공중파는 홈쇼핑이 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채널 편성도 어찌나 사이사이 잘했는지. 예능 본방에도 중간 광고가 이렇게나 많아졌는지 몰랐다. 물론 그냥 지나치면 되는 거지만 잠깐 스쳐 지나간 광고가 다음 날 떠올라 구매를 하고 있었다.


4. 대화를 잃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엔 핸드폰 사진을 TV로 연결해서 큰 화면으로 부모님께 보여 드리며 하하 호호 추억을 곱씹곤 했는데 역시나 이것도 와이파이가 필요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그냥 작은 스크린으로도 보여 드릴 수 있지만 처음 몇 장은 줌인으로 얼굴을 확대하시다가 사진들을 끝까지 보신 적이 없다.


5. 시간을 잃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터넷을 해지할 때만 해도 시간을 좀 더 유용하게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의지치를 높이면 되겠지만 내 의지는 반대로 흘러갔다. 오히려 꼭 보고 싶은 프로그램 시간을 기억하고 그때 맞춰 TV를 켜고 있었다. 졸린대도 끝까지 봐야지 하며 어이없는 의지만 강해졌다.



어느 글에서 보았다. 인간의 뇌는 부정의 개념을 이해 못 한다고. 바다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바다를 생각하고, 자전거를 피하라고 하는 순간 자전거만 찾고 있다고. 부정적인 생각은 오히려 강조하는 효과만 난다고 한다.


인터넷과 TV를 하지 않고 생각의 시간을 더 가지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확실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방법만 찾게 되었다. (지금도 관련된 글까지 쓰고 있다니…) 왜? 그 시간에 대신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니 온통 인터넷과 TV 생각. 인터넷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내 생각과 시각의 문제였다. 부정의 생각을 해지하고 내가 하고 싶은 긍정의 생각을 시작해야 되는 것이었다.


퇴근 후에는 일 생각하지 말자, 아침 빈 속에 커피 마시지 말자, 밥 먹은 후에 후식으로 빵 좀 그만 먹자… 매일 하는 생각이지만 매일 지키지 못한다.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더더욱 일 생각, 커피 생각, 빵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니 다행이다. 생각나게끔 만들면서 생각하지 말라고 다그친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ㅠㅠ 퇴근 후에 빈백에서 내가 읽고 싶었던 책 읽는 상상, 따뜻한 차를 마시면 배가 편해질 상상을 해줘야겠다. (빵은 좀 어렵네…) 내일 출근해야 하는 지금 이 순간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대신 일을 후련하게 끝내고 연말에 평온한 바다를 보며 버진 모히또를 마실 생각을 하니 조금 평온해진다.



다시 내 뇌에게 ‘할 것’을 얘기해주고 싶다.


1. 그냥 모닝 요가는 하기 귀찮았던 거다. 요가를 핑계로 핸드폰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잠이나 더 자자.


2. 시력은 어차피 나빠진다. 보고 싶은 거 다 보자. (이렇게 생각하니 청개구리처럼 안 보고 싶네.)


3. 돈은 쓰라고 있는 거다. 후회를 하든 칭찬을 하든 일단 쓰고 잘 쓴 게 맞는지 리뷰를 하자.


4. 사진이 대화의 장애물이라니. 10장 찍을 시간에 1장만 찍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자.


5. 자꾸 이럴 거면 그냥 인터넷 재약정하면 된다.


뇌한테 하지 말라고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말해주자


앞으로 뇌한테 하지 말라고 그만하기. (앗, 쓰고 보니 이게 안 된다는 거다!) 인터넷 대신 약정 없는 부정 생각부터 해지가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살치킨’을 안 먹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