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4] 2코스 온평 - 광치기. 남을 통해 나를 보다
나는 노란 고양이보다 더한 말썽꾸러기였다.
초등학교 때는 책상을 긁어서 선생님이 1주일 동안 나에게 말을 붙이지 말라고 했었다(고 한다). 중학생 때는 그 작은 눈에 보라색 서클 렌즈를 꼈고, 고등학생 때는 야자를 땡땡이치다가 걸려서 반 전체가 혼났다. 그렇게 겁 없던 내가 올레 2코스는 한적하다는 말에 움찔해서 함께 걷는 아카자봉을 신청했다. 어른이 되니 모범생이 되고 싶어졌나 보다.
아침 9시 반, 15명의 올레꾼과 함께 15.8km의 올레 2코스를 시작했다.
역시나 내가 제일 막내였다. 나이도, 걷는 속도도...! 아카자봉 리더가 두 분 계셨는데 후봉에 계신 리더 (후리더)가 얼른 오라며 손짓하셨다. 1년 새 내 체력도 변했구나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올해도 반겨주는 메밀꽃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 다시 앞만 보고 걸었다.
30분 걸려 도착한 곳은 벽랑국 세 공주가 혼인했다는 ‘혼인지’였다. 아쉽게도 여기까지 걸어온 과정의 기억이 거의 없다. 옆을 좀 둘러보려 하면 후리더가 나를 챙겼다. 이제는 앞도 아닌 땅만 보고 빠르게 걷고 있었다. 기억을 위해 사진이라도 찍으면 “올레길에 사진 찍으러 왔어요? 걸으러 온 거지”라며 임무에 충실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대수산봉 정상에 도착했다.
멋진 장관 때문일까? 혼인지 화장실 앞 담벼락을 포토스팟으로 만들어버린 빨간 별 유홍초, 생각보다 힘들지 않던 대수산봉 등산길, 나에게 본인이 막내가 아닌 게 오랜만이라며 신기해하신 40대 아저씨 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안 났다.
대수산봉 정상은 꽤 멋졌다.
우도, 성산일출봉, 섭지코지를 한 장면에 담을 수 있어 너도 나도 중간 스탬프 간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 덕분에 막내를 탈출하신 40대 아저씨는 특유의 인싸 능력으로 사진작가를 맡으셨다.
”꼬맹이 아가씨, 핸드폰 줘 봐“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위로 아래로, 앞으로 옆으로, 무려 세 포인트나 돌아가며 사진을 찍어주시는데 마치 개인 스냅샷 촬영을 신청한 듯했다. 선발에 서 있던 아카자봉 리더 (선리더)님도 포인트를 알려주시느라 바쁘셨다.
드디어 올레길이 기억 속에 스며드려는 찰나 후리더님의 통솔이 시작됐다. ”자, 사진 그만 찍으시고, 얼른 내려갑시다. 30분 안에 점심 먹으러 가야 해요.” 모두들 서둘러 내려가는데 뒤에서 후리더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좀 일찍 도착하겠네. 어떡하지? “ 서둘러 내려온 우리는 내리막길이 끝나고 5분 휴식을 했다. 응??
후리더님의 시간 계산 덕분에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준비된 밥을 바로 먹을 수 있었다. 밥맛은 꿀맛이었다. 된장국, 미역국, 갈비찜 모두 먹어본 음식이었지만 비빔밥에 된장국 한 국자를 넣으니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을 접하게 되었다. 새로움을 좋아하는 나, 꼭 새로운 것만 찾을 필요 없이 기존에 있는 것을 조합해도 새로움이 나타나는구나! 된장국 한 국자에 눈이 트인 게 웃겨서 사래에 걸려버렸다. 콜록콜록. 물 대신 막걸리를 권하는 아저씨. 세 번 권하셨으면 마셨을 텐데 다행히 두 번만 물어봐주셨다. 휴 ^^
점심시간은 35분 만에 끝났다. 몇 시쯤 끝나냐는 아주머니의 질문에 후리더님은 자신 있게 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3시 40분이요. 두고 보세요, 딱 이때 마칠 거예요. 저는 다 계획이 있어요.”
족지물에 발도 담그고, 식산봉도 올라가고, 드디어 종점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3시 30분이었다.
“보세요, 맞죠? 저는 다 계획이 있다니까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후리더님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막내 탈출 핵인싸 아저씨와 선리더님은 올레꾼들과 사진을 찍고 계셨다. 마지막까지 간세 앞에서 안 찍으면 후회한다며 한 명씩 또 인생샷을 남겨주셨다. 모두들 무한 감사를 드렸다. 우리의 안전을 책임져주신 후리더님은 다음 약속이 있으신지 벌써 가신듯했다.
함께 올레를 걸으면 그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를 살짝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후리더님은 규칙을, 선리더님은 사람과 어울림을, 핵인사 아저씨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듯했다. 내가 만약 이 그룹의 리더였다면 어떤 스타일이었을까? 남을 통해 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후리더님처럼 원칙을 신경 쓸 때가 많다. 누군가는 나에게 완벽주의자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3시 30분보다 올레길을 걷는 과정이 더 중요했던 것처럼, 내가 신경 쓴 원칙은 사실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나만의 원칙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만든 바로 그 허울뿐인 원칙이 나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고 있었다.
3시 30분에 도착하는 것은 왜 중요했을까? 누구를 위한, 누가 세운 원칙일까? 사진, 사람들과의 대화, 주변 감상을 포기할 정도로 모두가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15명 중에는 나처럼 도착시간보다 다른 가치를 추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제의 구름처럼, 원칙도 변하는, 허상이지 않을까?
도착점 광치기 해변에서 숙소로 걸으며 나를 옭아매었던 허울뿐인 원칙을 하나씩 던져보았다. 손해보지 않기, 가성비 따지기, 생각보다 실패를 피하기 위해 내가 따르고 있던 원칙들이 많았다. 모두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내가 믿고 있는 원칙에 맞지만 즐겁지 않은’ 선택을 하고, 정답 없는 원칙에 나의 삶을 맡기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모범생이 있을지언정, 인생에는 모범생이 있을 수 있을까? 올레길 걷기 이틀 째, 어제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오늘은 정해진 원칙은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혼란스러운데 단순해진다. 결론을 내려 끙끙 대다가 그 결론 또한 허상이라는 생각에 그냥 마음껏 사진을 찍으며 현재를 즐기며 오늘의 올레를 마무리했다. 아직 현재를 즐기는 데에 연습이 필요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