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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네 Oct 03. 2024

나 혼자 챌린지 - 웃은 채로 올레길 걷기

[올레 17] 4코스 표선-남원 최장거리 19km

5시 반, 눈이 떠졌다! 올해 들어 (아마도) 처음으로 일출을 보았다. 매일 떠오르는 해인데 오늘따라 더 장엄해 보였다. 흑돌 위에 앉아 홍돌 하나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주머니 한 분과 아저씨 한 분도 빤히 쳐다보고 계셨다. 나도 저 나이대가 되어 해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보다 더 두근거렸으면 좋겠다.


표선해수욕장에서 출발한 4코스는 휠체어도 가능한 해안 코스였다. 계속 바다만 보면 지루할 것 같았는데 중간 지점까지는 꽤 흥미로운 길이었다. 바다도 조금씩 다르고, 돌과 덩굴로 이루어진 바당길이 간간이 나와서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벌써 10월인데 날씨는 여전히 27도인 제주도. 분명히 오늘 비가 온다고 했는데 뜨거운 날씨로 오늘도 나 혼자 걸었다. 이쯤 되면 제주도를 전세 낸 기분이다. 그때 내 앞에 멈춰 선 벤츠 세단! 번호판이 ‘허’가 아닌 걸 보니 제주도 도민이신가 보다. 40대쯤 되셨을까? 품격 있게 슬리퍼를 신고 내리시더니 돌 위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카페라테를 드시기 시작했다. 그늘도 없는 그냥 돌 위에. 나랑 똑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벤츠 아저씨. 나는 수련 중, 아저씨는 휴식 중.


선글라스 넘어 살짝 본 아저씨의 표정은 제주도 바다를 보는 흔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바다에 화풀이를 하고 계셨을지도. 우리는 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바라보는 중, 아저씨는 보는 중. 그 어떤 아름다운 바다도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구나.



사람도 없으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관심이 갔다.

“아름다운 표선”


어제 분명히 ’ 아름다운 마을 종달리‘였는데 표선도 슬로건이 같네? 그때부터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라는 CCM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데 정말 “아름답다”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올레 프레임에 맞추어 바다 사진을 찍는데 “우와 아름답다~”라는 말이 나왔다. “예쁘다”라는 말보다는 좀 더 무게 있고, 변하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좀 더 진정성이 느껴지는 단어다. 내 기준으로 “예쁘다 “가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단어라면 ”아름답다 “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단어다.

마지막으로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언제였지? 내가 해 본적은?

풍경을 두고 아름답다고는 했지만, 사람을 아름답다고 표현한 적은 생각이 안 난다. 물론 들어본 적도 기억에 없다 (뷰티풀 제외).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풍경처럼 내 주변이 아름다우면 시너지 효과를 받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사람들한테 아름답다는 말을 자주 해주면 된다. 상상만으로도 오그라들지만 서울에 돌아가면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00님 오늘 너무 아름다운데요? 그 생각 너무 아름다운데요? “ 아앜! ^^;; *목표: 올 해가 가기 전에 아름답다는 말 한 번 듣기



계속 바다만 보고, 사람 한 명 없으니 심심해졌다. 지나가는 차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차 5대 지나갈 때까지 웃고 있기! “


10초 안에 트럭이 지나갔다. 흐흐 좋았어.

그 뒤 1분 동안 차가 하나도 지나가지 않았다...

얼굴에 살짝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너~무 어색했다. 누군가 웃긴 얘기를 할 때 입꼬리가 올라가는 시간은 불과 3초 내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10초 넘게 웃음을 유지할 일이 일상에서 없었다. 광대 같았다. 제주도에 와서 혼자 이런 미션을 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그냥 웃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 차가 지나갔다. 너무 반가워서 활짝 웃었다. 운전하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면서 아저씨도 활짝 웃으셨다. 부끄러웠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차가 오지 않다가 마지막 세 대가 한꺼번에 오면서 게임은 종료됐다.

그렇게 나는 18분 동안 27도 태양 아래 조커 표정으로 제주도 거리를 걸었다. 마주 보고 오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 게임을 통해 그래도 나름 깨달음이 있었다.

1. 웃는 것도 운동, 요가처럼 자주 연습이 필요하다. (한 동안 안 웃으면 어색 + 경련이 온다)

2. 내가 웃으면 날 보고 있는 상대방도 웃는다.

3. 가짜 웃음으로 시작해도 찐 웃음이 된다. 진짜 행복하든, 어이가 없어서든.

4. 계속 웃고 있으면 신기하게 입꼬리가 더 올라간다. 운동, 요가와 다르게 효과가 빠르다.

5. 제주도 표선에서 남원 가는 해안도로에는 차가 없다. (나중에 할리 바이크가 꽤 보였다)


매일 5분 요가 대신, 매일 5분 웃고 있기에 도전해 볼까 보다. 생각보다 재미있다.


중간 지점 ‘알토산 고팡’을 지나 마을을 지나 또다시 2시간 정도 해안도로를 열심히 걸었다. 앞에 웃음 게임 덕분인지 4시간을 넘게 걸었는데 조금 에너지가 남아 5코스를 연이어 시작했다가 5분 만에 포기하고 버스를 탔다.

오늘의 올레는 이번 여행에서 최장거리였다. 표선에서 남원까지 무려 19km를 걸어야 했다. 다행히? 아쉽게도? 오름은 없어서 만만하게 봤는데 아침에 날 감동시킨 그 커다란 하늘의 홍돌이 변수였다. 너무 뜨거워 팔이 새까맣게 탔다. 좀만 더 걸었으면 제주의 흙돼지가 될뻔했다. 동시에, 덕분에 쉬기도 너무 더워 계속 걷다 보니 수많은 생각과 함께 나 혼자 웃기 챌린지도 만들어하는 ‘뜻밖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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