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6] 3B 코스 온평-표선
아침 9시 반, 해안 따라 2km의 짧은 러닝을 마치고 온평포구에서 3-B코스를 시작했다. 이번 여행의 벌써 4번째 올레길이라니. 바다를 계속 봐서 그런지, 사실 감흥이 조금 떨어지고 있었다.
역시 올레길이다, 바로 내륙코스로 들어갔다. 아침 올레길은 낙엽 밟는 소리, 새소리, 바람인지 바다인지 쉬쉬하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새소리와 내 숨소리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숲 속에 이렇게 다양한 소리가 있는지도 몰랐다. 걷기만 하는데 극강의 평온함이 찾아왔다. 이게 바로 마음 챙김인가 싶었다.
30분 만에 도착해 버린 바닷가. 아쉬웠다. 그리고 집에서 영상이나 몇 개 보면 흘러갈 짧은 30분 동안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길을 찾는데 눈앞에 시작점인 온평포구가 보였다. 10분 거리도 채 안되어 보였다. 가끔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결과적으로 좋구나.
신산 해안도로에는 색도, 향도 잃어버린 수국이 아직 좀 더 봐달라고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또다시 잠깐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몇 개월만 지나면 모든 플래시를 받고 있을 수국들이기에 어쩌면 죽음 또한 영원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바닷가를 오늘도 더운 27도 날씨에 힘들게 걷고 있는데 외국인 부부 두 명이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are you walking olleh?"
어제 게스트하우스 파티에서 단 한 명도 몰랐던 올레를 외국인이 알다니! 알고 보니 60대를 바라보는 호주 노부부였고, 2주 휴가를 쓰고 올레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중간 스탬프를 안 찍었다고 1시간에 걸쳐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와 스탬프 지점을 물어보고 계신 게 신기할 다름이었다. 10시간 비행을 거쳐 도착한 이 제주도를 나는 1시간 만에 와서 즐길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 신기하고 감사했다.
보말김밥을 먹고 곧이어 도착한 바다 목장. 세상에, 한국에서 이렇게 넓은 바다 옆 넓은 풀밭에서 소들이 풀 뜯어먹고 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호주 노부부를 또 만났다. 한참을 얘기했다. 바다도, 하늘도, 풀밭도 넓은 제주도에 오니 내 마음도 그만큼 넓어졌나 보다. 서울의 나는 길에서 질문하는 사람도 걸어가면서 답을 해줬던 사람인데 말이다. 노부부와 웃으며 5분 대화를 하니 신기하게 힘이 또 생겼다.
바다목장을 지난 후부터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날도 너무 더웠고, 이번에는 8kg 백팩까지 메고 걷고 있어 내 눈은 그늘만을 찾고 있었다. 오늘도 쫙 펼쳐진 아스팔트 도로에 걷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처음으로 히치하이킹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차도 거의 없었다. 동남아 느낌의 아무도 없는 곳에서 태닝을 하고 싶다면 표선이 딱인 듯하다.
결국 우산까지 쓰며 도착한 표선 해수욕장! 어제의 15km와는 차원이 다른 기나긴 여정이었다. 겨우겨우 스탬프를 찍는데 누군가 계속 소리를 질렀다. 다시 들으니 내 이름이었다!
호주 노부부는 벌써 끝내고 편의점 앞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있었다. 또 한참을 얘기하면서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5번은 뛴다고 하시면서 아저씨는 20kg를 감량했고, 아주머니는 100kg가 넘었는데 달리기를 하면서 정상 체중이 되셨다고 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 싱가포르에서 두 분이 같이 하프도 아닌 풀 마라톤을 완주했다고!! 한국 나이 60세인 두 분은 평범한 주부와 세일즈맨이라는 게 더 놀라웠다. 내가 너무 호응을 잘해드렸나, 아들 사진까지 보여주시면서 지금 여자친구와 헤어지면 연락해 준다고 하셨다. (전화번호는 왜 안 물어보셨을까? ^^;)
오늘의 올레길은 ‘넓다’라는 단어로밖에 표현이 안 된다. 자연도 넓었고, 만난 사람도 넓은 세상 속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왜 그렇게 비좁은 마음으로 살았을까?‘
몇 분에, 몇 백 원에, 아주 작은 이득을 위해 왜 그토록 나의 온 신경을 쓰고 에너지를 쏟았는지 모르겠다. 대인배, 배짱이 넓은 사람은 어떤 기분으로 살지 궁금하다. 숙소로 돌아가 근처에 가장 넓고 큰 카페를 검색했다. 오늘 저녁도 대짜다. 대인배로 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