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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네 Oct 19. 2024

나이 먹는 게 두렵지 않아 졌다

[올레 19] 5코스 남원-쇠소깍 13.4km - 사람의 씨앗을 심자

새벽 2시간이 준 행복에 한껏 취해있던 나, 고새 해가 숨어버리고 구름 낀 하늘을 보고 있자니 걷기에 완벽한 날씨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올레길도 중독인가 보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5코스의 시작인 남원 큰엉해변이었다. 1.5km의 남쪽 해안절경을 담은 큰엉 산책로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을 비집고 큰엉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 바위를 찍고 있는데 할아버지 두 분께서 말을 건네셨다.


”진짜 큰엉은 찍었어요?“


그러고 보니 한반도를 닮은 포토스팟과 호랑이를 닮은 호두암을 보고 ”나도 무서울 게 없다!“라고 외치느라 큰엉은 잊어버렸었다. 50m쯤 돌아가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큰엉을 겨우 발견했다. 까치발로 서서 반쪽짜리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다시 나타나셨다.


”여기가 사진 찍는 곳이에요.“


 수많은 관광객 속 혼자 있는 내가 안쓰러우셨던 걸까, 직접 포토스팟으로 데려다주셨다. 우와, 실제로 보니 ’큰엉’이라는 글자 두 개로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동굴이었다. 용기 내어 할아버지께 감사함을 표시했다.

 

“이런 데서 사시면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나 서울에서 왔는데?”


아이코, 머쓱 머쓱. 할아버지 본인은 예전에 왔던 곳이지만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와서 행복하다고 하셨다. 나이가 들면 멋진 자연보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해질 수밖에 없겠구나.


내가 70대 때 이 올레길을 혼자 오면 지금처럼 행복할까?


낯선 사람과의 대화로 기분 좋게 시작된 5코스는 생각보다 매력적이었다. 아스팔트 도로가 거의 없이 바위, 흙, 돌들을 밟으며 자연 속으로 스며들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이 아닌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이었다.


어느새 중간 스탬프 지점인 동백나무 군락지에 도착했다. 1900년대 현맹춘 할머니께서 ’황무지에 불어오는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의 동백 씨앗을 따다가 홀로 일구신 울창한 숲‘이었다. 한 사람의 씨앗이 100년이 지나 이제는 많은 이에게 농사와 관광도 해줄 수 있게 해 주다니.

나는 당장 10년 뒤를 위해
어떤 씨앗을 심고 싶을까?


그 뒤로도 5코스는 다채로웠다. 풍경도, 사람도.


바다 옆 게이트볼장에서 삼삼오오 게임을 즐기시는 5-60대 아저씨들, 그리고 혼자 온 게 기특하다며 응원해 주시는 아주머니들을 지나 넓은 바위 ‘넙빌레‘도 보았다. 어제 대인배가 되자라는 마음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곳이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아줌마 아저씨가 손을 잡고 넙빌레 넘어 바다를 보고 계셨다.


개천절을 맞이해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신나게 걷다 보니 위미항에 도착했다. 젊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보였다. 정말 환하게 웃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왜 행복할까? 돈을 벌고 있어서?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있어서? 혼자가 아니라서? 사실 그냥 오늘은 태양 없는 구름 낀 날씨라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위미항에서 종점 쇠소깍으로 넘어가는 길은 위미 (with me) 이름답게, 나 혼자였다. 아침부터 마주친 사람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게 만났고, 모두들 누군가와 함께였다.


40세의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앞자리가 바뀌니 정말 나이가 확 들은 것 같았다. 20대 때 30대가 그래 보였는데 40대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사실 조금 겁도 났다. 청춘이 끝났을까 봐.


그때 수많은 감귤 나무들이 보였다. 아직 파랗다.

엊그제 감귤을 먹었는데 잘 익은 노란 귤은 정말 달았고, 덜 익은 파란 귤은 너무 셨다.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40대가 되는 게 두렵지 않아 졌다.


잘 익은 노란색 감귤은 정말 달달한 것처럼
 40대, 50대 나이가 들수록
난 더 달달한 사람이 되는 거야! ^^


그러고 보니 아파트도 맨 꼭대기층을 제외한 중고층이 저층보다 더 비싸다. 심지어 중층은 로열층이라고도 한다. 올라갈수록, 나이가 먹을수록 나는 더 가치 있어진다. 더 큰 시야가 확보되니까.


갑자기 기대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신 맛이 강한 톡톡 튀는 삶이었지, 그런데 이제는 아주 찐하고 달달한 삶이 시작되겠구나라는 생각에 설레었다. 그것도 꽤 맛있는 인생이겠구나.

노랗게 달달한 중년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 삶이었다. 그때의 나는 경제적 여유도 지금보다는 더 있을 테니 더 많이 나누어 줄 수 있겠지, 그때의 나는 누군가와 함께 이 여행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동백나무 현맹춘 할머니처럼 지금부터 조금씩 사람의 씨앗을 심어야겠구나라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때 드디어 사람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가장 기본적인 사람의 씨앗, 인사를 했다. 내가 먼저! 이 인사가 뭐라고 작은 용기가 필요했다. 돌아오는 인사에 오히려 내가 달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잘 익은 노란 감귤을 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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