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20] 6코스 쇠소깍 - 서귀포 10.1km. 인생은 예측 불가
오늘은 진짜로 비가 온 다는 기상 예보. 선글라스도 안 가져왔는데 오늘도 덥다. 27도다.
세상에 두 가지는 절대 예측할 수 없는 듯하다. 날씨와 내 마음. 당장 오늘의 날씨도 정확하게 못 맞추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내 인생과 마음을 예측하려 했을까? 오늘 나에게로 걸어가는 여행은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예측불가 여행이었다.
느지막한 오후, 쇠소깍에서 이번 여행의 7번째 올레를 시작했다. 관광지답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에메랄드 빛깔의 강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 나무 카약과 테우를 체험하는 사람들, 모두 가을의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경제가 안 좋아서 제주도가 휑한 줄 알았는데, 올레길에만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20대 때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는 나도 삼각대를 펼치고 사람들이 없어지길 기다렸다가 친구와 셀카 100장은 찍고,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바빴었다. 10년도 안된 지금은 혼자서 나에게로 걸어가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인생은 정말 예측 불가구나.
약간의 쓸쓸한 그리움을 뒤로하고 다시 사람 없는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이한 자연경관에 이내 다시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이 들어왔다. 전복내장 모양을 닮은 게우지코지라는 기암부터 긴 나무로 만든 100% 친환경 빨랫대까지, 관광지에는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마음껏 구경했다.
서귀포 도심에 가까워질 무렵, 생 바다에 생으로 다이빙하는 서귀포 중학생들이 보였다. 가위바위보를 하며 다음 용자를 가려내기 바빴다. 나도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는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수영복도 깜빡하고 안 챙겨 왔다. 내가 변한 걸까? 이렇게 노잼이 되었나? 그래도 아직 뛰어들고 싶다고 소곤대는 나의 마음의 소리가 너무나 반가웠다.
대리만족으로 다이빙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가위바위보를 계속 비기는 건지, 기권을 하는 건지, 한 참을 기다려도 두 번째로 다이빙하는 용자가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배터리에 빨간 불이 떴다. 그때부터 충전할 수 있는 곳을 찾느라 올레길에 집중하지 못했다. 역시... 뭐든지 기본 체력이 되어야 한다. 행복도 마음만이 아닌 몸과 마음 둘 다 건강해야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행복도 체력이다.
소라의 성에서 배터리와 몸을 충전하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과거의 나는 도전적이었다. 현재의 나는 혼자 있는 게 편하고, 겁도 많아졌다. 배터리가 차오르는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성격이 변한 게 아니라, 체력이 변했구나. 에너지가 문제였다.
지금이라도 에너지가 생긴다면? 직장을 그만두고 돈도 안 벌어도 된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까 상상해 보았다. 나의 원대한 목표는? (핸드폰은 이제야 20% 충전되어서 시간은 충분했다).
계속하고 싶은 것: 자연 속 걷기
새로 하고 싶은 것: 새로운 사람 만나기
나의 장점: 외국어와 소통
단순했다.
새로움, 자연, 소통
근본적인 행복 요소들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기다리지 않더라도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대한 목표가 따로 없었다. (체력만 높이면 된다.)
체력을 키우자라는 생각으로 남은 올레길을 더 씩씩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서귀포 중심지에 다다랐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치며 물었다.
“웨어 이즈 올뤠 마켓?”
중년의 외국인 아주머니가 매일올레시장을 찾고 있었다.
“고 스트레잇!”
여기까지가 여행 전의 나였다.
지금의 나는 에너지도 있겠다, 충전도 됐겠다, 내가 꿈꾸는 미래를 지금 실현해 보기로 했다.
“웨어 알유 프롬?”
“이스라엘!”
알고 보니 한국에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혼자서 제주도로 오신 50대 이스라엘 아주머니셨다. 그런데 투어 상품이 많이 없어서 혼자 제주도를 관광하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식당 정보도 알기 어려워 올레 시장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찐 올레 이정표를 뒤로 하고 시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장까지 가는 길 자체가 여행이었다. 만난 지 10분 밖에 되지 않는 이 외국인과 벽화에서 사진도 찍고, 옷쇼핑도 하고 (!), 무엇보다 내 소중한 올레 패스포트를 보여주며 제주도의 진짜 올레길을 홍보했다. 오랜만에 사람과 얘기해서일까, 올레길을 얘기해서일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올레코스를 설명했다. 그렇게 우리는 1시간을 함께했다.
밤 8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포틀럭 파티는 이미 시작했고 내가 사 온 양념 흑돼지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정말 뜨거웠다. 해보고 싶은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외국인 올레 홍보대사! 새로움, 자연, 걷기 3박자를 맞춰주는 꿈이었다. 지금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직장인일 예정이지만, 그냥 상상만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원하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 이스라엘 아주머니로부터 문자가 왔다.
”이스라엘에 오면 연락 줘. 우리 집에서 언제든지 재워줄게. 참, 나는 투어 가이드야. 올레!”
벌써 파트너가 생긴 건가. 인생 진짜 예측 불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