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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네 Oct 25. 2024

MBTI 'I'인 나, 사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올레 21] 7-1코스 서귀포 15.7km

올레길 걷기 7일째, 솔직히 오늘은 좀 고민되었다. 어제 게스트하우스 사람들과 새벽까지 수다를 떠느라 아침 9시가 되었는데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파티가 끝난 후 밀려온 외로움 때문인지 쌀쌀한 날씨 탓인지 포근한 이불속에서 계속 꿈만 꾸고 싶었다. 1박만 예약한 게 다행이다. 11시 퇴실시간에 맞춰 현실의 세계로 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걷기 말고 계획도 없었다.

그래, 일단 걷자. 중간에 돌아오더라도 일단 걸어보자.

올레길은 선물이다. 서귀포 시내를 빠져나와 숲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마터면 이불속에서 꿈만 꾸는 잘못된 선택을 할 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보다 진한 풀 내음을 뚫고 동남아를 연상시키는 작은 맹그로브 길을 지나니 제주도에서는 본 적 없던 가장 아름다운 논밭이 펼쳐졌다.

중년의 감귤만큼이나 노란 논밭 위에, 잠자리와 더 노란 나비들이 어린이처럼 호기심을 뿌리며 날고 있고, 병풍으로 쥬라기공원을 연상시키는 나무들이 깔린 바로 이곳에서, 당장 결혼식을 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논밭도 나비도 나무도 처음 본 게 아닌데 왜 이렇게 황홀한 걸까?


조화였다. 자유로운 나비와 잠자리가 있기에 논밭이 금빛 장판으로 보이고, 그런 논밭이 있어 초록 나무들도 빛이 났다. 아름다운 것들이 조화롭게 모여있는 이곳이 천국이었다. 아직 30분밖에 걷지 않았는데 이렇게 행복해져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평온해졌다. 어제 행복도 체력이다라는 걸 알았다면, 오늘은 행복은 뜻밖이고, 하나보다는 여러 조화가 극대화를 시킨다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행복은 뜻밖의 조합이다.

내가 행복했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한 대학을 떨어지고 다른 대학에 붙었을 때, 야근으로 매일 가던 카페 영수증 이벤트에 응모했다가 일본 여행에 당첨되어 부모님 여행을 보내드렸을 때, 잊고 있던 주식 주가가 올랐을 때. 대부분 뜻밖에 찾아온 행복들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하프 마라톤을 끝냈을 때, 나는 행복했지만 좀 다른 행복이었다. 행복보다는 자랑스러움이랄까? 뛰기 시작했으면 완주를 할 것이라고 나름 예상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크루 없는 홀로 뛰기였기에.


뜻밖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대부분 기대치를 낮추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대치, 즉 욕심을 줄이면 행복이 오기도 전에 아쉬워할 사람이다. (이제 인정했다, 욕심쟁이!) 나에게 필요한 건 뜻밖의 상황의 찬스를 높이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두려움 좀 떨쳐 버리고, 넓은 논밭처럼 배짱 있게 사는 것 말이다. 그리고 조화를 위해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뜻밖의 노루와 눈 마주침!


7-1코스 중간지점은 고근산이다. 땀도 나고 힘들었지만 좀 더 행복했다. 생각보다 높은 산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에 다다라 혼자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오늘도) 한 아저씨가 말을 건네셨다.


“얼굴은 야리야리하게 생겼는데 허벅지가 장난이 아니네!”


사실 장난인 허벅지인데 갑자기 칭찬을 들으니 끙끙 올라오면서 느낀 행복보다 순간 더 행복해졌다. 머쓱했다. ^^ 역시 행복은 뜻밖이야.

고근산을 내려오니 무인 감귤 상점이 있었다. 무인이라 내심 섭섭했다. 혼자 시간을 보낸다고 제주도까지 내려온 ’I‘인 내가 이제 사람을 찾고 있다니! 고생한 내 허벅지를 위해 일단 감귤을 사고 엉또폭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바로 앞에 이번엔 사람, 아저씨가 노상에서 감귤을 팔고 계셨다.


“아, 여기서 살 걸! 아저씨, 저 무인에서 사버렸어요!”


I의 뇌가 인지하기도 전에 말을 건네고 있었다. 감귤의 당도를 주제로 몇 분을 얘기했다. 돈거래 없는 그저 웃음의 교환이었다. 아저씨의 비싼 신종품과 내 노지 감귤과 1:1 교환은 덤이었다.


과즙으로 찐득해진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덕에 반나절만에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사람들과 끊임없이 웃어서 그런지 얼굴이 리프팅되어 있었다. 엊그제 혼자서 20분 가까이 미소 챌린지를 한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다. 아니면 방금 감귤 아저씨와 나눈 대화 덕분일까? 거울 속 나는 오랜만에 입꼬리가 올라간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후 16km의 7-1 올레코스가 끝날 때까지 올레꾼을 세 분정도 더 마주쳤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딱히 용기를 낼 필요도 없었다. 사람이 편해진 건가?


그럴 리가. 나는 회식뿐만 아니라 점심시간도 혼자 있는 게 편한 사람이다. 주말에도 사람들과 약속을 잡아 놓으면 그날은 100% 휴일이 아니다. 그런 내가 오늘 밤 예약한 1인실을 버리고 게스트하우스를 갈까 하며 숙소 취소 수수료까지 알아보고 있었다.


나, 사실 사람을 좋아하나?


직장에서의 나를 돌이켜보았다. 혼자가 편했다. 그런데 만약 직장 동료들을 어제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났었더라면? 오히려 자라온 환경도 비슷하니 훨씬 대화가 잘 통했을 것이다. 순간 나는 그동안 직장 동료들을 한 번도 그저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 사람들도 직장인이기전에 사람이다. ’게하’로 출근한다고 상상하니 동료에게 편하게 관심사를 물어보고 있는 내가 그려졌다. 회사에서의 나는 가짜였나 보다. 사람한테 관심 없는 척, 혼자 있어하고 싶어 하는 척.


체력과 여유가 없었던 거지, 나 사실 사람을 좋아했구나.



사람은 많이 만나면 만날 수록 좋아진다. 대화의 비법, 관계의 핵심 등 여러 책들도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본적인 인사 한 두 마디라도 사람과 실제로 교류하는 것 같다. ‘I‘라는 단어도 아닌 letter 하나로 나에 대해 단정 지은 나에게 미안했다.


예약한 1인실로 체크인을 하는데 편한 아쉬움이 드는 한편,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넓은 금빛 논밭에 사람 씨앗을 심을 생각에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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