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der Pens
동쪽으로 열세 시간을 날아가야 이를 수 있는 곳, 캐나다의 최대도시 토론토에 왔다.
문구덕후인 나는 새로운 곳에 오면 문구점에서부터 그 도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켄싱턴 마켓 인근의 원더 펜스(Wonder Pens) 문구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52 Clinton St, Toronto, ON M6G 2Y3 캐나다
찾아가는 길은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빨간색 노면 전차(Street Car)를 타고 대학로(College St.)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Grace St.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이 멋들어진 노면 전차는 우리나라의 버스전용차로처럼 도로의 중앙을 지나는데 속도가 걷는 것보다는 빠르고 자전거보다는 느리다. 국가번호도 +82로 시작하는 빨리빨리의 민족에게는 한 없이 느리게 느껴지는 속도감이지만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다.
전차에서 내린 후 코너에 위치한 라멘가게를 끼고돌면 갈색 간판의 원더 펜스 문구점이 나타난다. 라멘도 맛있어 보였는데 시간대가 애매해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반나절짜리 여행자의 숙명이다.
문을 열고 문구점을 들어서면 앤틱한 나무바닥과 높은 층고, 무심한 천정 마감이 독특한 안정감을 준다.
천정의 커다란 채광창도 밝은 분위기와 함께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문구점을 찾는 사람들도 젊은 동양인부터 나이 든 백인들까지 다양하다. 주변에 대학가와 번화가, 차이나타운이 공존하는 까닭이다.
고급진 만년필 코너는 늘 백화점의 명품코너처럼 한껏 멋을 낸 단정함이 있다.
'언젠가는 만년필의 세상도 경험해봐야 할 거야'라는 문구덕후의 숙명과도 같은 느낌은 있지만 아직은 소박한 연필이 좋다.
백화점의 명품코너를 지나듯 역시 눈으로만 감상하고 지나친다.
나의 주된 관심사는 늘 연필이다.
만년필의 화려함에, 딥펜의 클래식함에, 글라스펜의 우아함에, 볼펜의 실용성에 밀리지만 연필만의 투박한 매력이 있다.
세계적인 필기구 회사인 파버카스텔의 철학처럼 연필은 '원초적 창조의 도구'다.
연필이 없었다면 문학과 음악, 미술사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연필들 중에서도 대중성을 놓치지 않은 명품 연필을 꼽으라면 단연 팔로미노의 블랙윙이 아닐까?
작가 존 스타인벡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듯 난다'라고 표현했던 그 연필 말이다.
덕후들을 자극하는 시즌제 발매와 한정판 마케팅으로 늘 수집욕을 자극한다.
블랙윙의 유혹을 참아내다 카멜 Camel 연필을 발견했다. 사진의 가장 우측에 있는 짙은 나무색의 연필이다.
흰색과 짙은 회색의 두 가지 지우개가 달려있는데 페룰*없이 몸통과 바로 연결된 지우개가 특징이다.
주*) 페룰 : 지우개를 달기 위한 금속제 마감띠
모나미가 이 회사와 합작해서 153연필을 발매했었다. 명실상부 국내 최고 필기구회사인 모나미의 대표작 153볼펜을 모티브로 한 연필이다.
검은색 나무에 하얀 도장을 칠하고 새까만 지우개를 달아 153볼펜을 오마주한 앙증맞은 디자인이다.
153의 디자인을 가장 잘 살리려면 페룰이 없어야 했을 테니 카멜연필과의 제휴는 당연했겠지.
모나미의 153, 블랙윙의 602, 파버카스텔의 9000처럼 회사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스테디셀러를 좋아한다.
국내에 얼마 남지 않은 연필공장을 운영하는 동아연필도 이런 스테디셀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팬심 가득 담아 해 본다.
벽 한켠에는 원더 펜스의 이벤트 일정이 담긴 게시판도 있다.
커피회사의 팝업스토어나 편지 쓰기 클럽, 캘리그래피 행사도 예정되어 있다.
독립서점도 그렇고 이런 문구점도 이제 전통적인 상품만 팔아서는 온라인샵에 맞서기 힘든 시대다.
원더 펜스도 지역 문화 허브의 역할도 하며 공간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작업들을 하고 있구나.
SNS에서 독립서점의 분투기들을 보며 늘 응원하게 되는데 이런 아이디어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봤으면 좋겠다.
지역의 문구점을 여행하다 보면 그 도시와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적인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래된 건물들이 나오기도 하는 곳,
번화가, 차이나타운과 대학들이 중첩되어 펼쳐지느라 관광객과 현지인, 유학생들, 심지어 노숙자들도 함께 살아가는 곳.
하지만 미국의 다운타운보다는 덜 적대적인 곳.
토론토와 어딘가 닮은 문구점, Wonder Pens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