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죽음의 무게는 얼마일까
시무룩한 하늘 아래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병실 안, 몸이 기괴하게 오그라든 아기가 가만히 누워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던 아기. 엄마 뱃속부터 움직임이 멎어 팔다리가 다 굳은 채 태어난 아기. 제니Jenny 머리 안에는 뇌 조직이 거의 없었다. 대신 뇌수액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뇌가 거의 없으니 움직이질 않고 숨 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가슴도 워낙 작았다. 작은 가슴 안에는 자라다만 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푸푸푸푸’ 하는 고빈도진동환기(인공호흡기의 일종으로 벌새의 진동하는 날갯짓처럼 작디작은 양의 공기를 빠르게 아기의 폐로 들여보낸다. 주로 구형 인공호흡기도 충분치 않으면 쓴다) 소리 만이 적막한 병실을 가득 메웠다.
슬픔이 색깔로 보인다면 어떤 색깔일까. 아마도 이 아기의 피부색 정도이지 않을까. 보라색과 회색 중간 즈음. 시커먼 색이 되기 직전의 빛깔, 아기는 슬픔의 빛을 띠고 있었다. 부모는 제니의 뇌가 회복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료진에게 병실에서 나가라고 소리까지 쳤다. 날아가는 시간과는 달리 제니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밀랍 인형 같은 제니를 한시도 떠나지 않던 부모에게도 깨달음은 드디어 찾아왔다. 의료진의 진심도 가닿았다. 완화 치료로 전향할 수 있었다. 차가운 기기들을 다 제거하고 나서야 부모는 제니의 오그라든 팔다리를 보드라운 손길로 어루만지고 따뜻한 가슴으로 안았다. 불필요한 치료는 줄이고 오로지 제니의 안위에만 집중했다. 제니 손발바닥 도장을 찍고 손 지문으로는 목걸이 펜던트도 만들었다. 머리카락도 조금 잘라 보관함에 넣고 심장 소리도 녹음해 추억 상자도 완성했다.
제니는 곧 떠났다. 엄마에게서 나온 그 모습 그대로, 자연 그 자체의 모습으로. 병실 전체가 울었다. 부모가 제일 아파하고 슬퍼했다. 하나 몇 주 동안 제니를 사랑으로 보살핀 의료진의 가슴도 뻥 뚫렸다. 그 뚫린 가슴이 다시 채워지기도 전에, 또 다른 죽음이 신생아중환자실을 덮쳤다. 아주 작은 초미숙아의 급작스런 죽음이었다. 또다시 신생아중환자실 안으로 슬픔의 강이 흘렀다. 끝없는 슬픔이 자꾸 눈 밖으로 삐져나와 얼굴을 적신다. 내 얼굴의 강도 마를 줄 몰랐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죽음의 총량은 얼마나 될까. 자주 쓰는 옛말처럼 비가 오기 시작하면 하늘이 뚫린 것처럼 달구비가 쏟아지고 행운은 혼자 오지만 불운은 함께 온다. 이상적인 세상이라면, 하나의 상실을 겪으면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치유해야 한다. 맨살을 가르는 상처는 낫기 마련이다. 시간이 흐르면 날카로운 고통도 사라진다. 그래도 그 위에 흉터는 남는다. 매 초 쑤셔대는 아픔이 아닌 조금 무뎌진 감각, 고통은 잠잠해지기도 한다. 천천히 아무는 상처 위로 다른 상실이 더 깊게 살을 찢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적된 슬픔은 비감의 심연을 더 깊게 만든다. 누가 슬픔은 나누면 작아진다고 했던가. 슬픔은 전염병처럼 멀리 퍼져 모두를 아프게 한다.
슬픔에 압도당하면, 사람의 보호 본능은 회피를 부른다. 극도로 아픈 아기들이 자주 전원 오는 큰 소아병원에서 당직을 서면 보통 사망 선고를 피할 수 없다. 매 당직날마다 사망 선고를 내려야 할 만큼 죽음은 나를 자주 찾아온다. 아기가 곧 죽을 상황이거나 이 고비를 넘겨도 큰 장애가 따라와 미래가 밝지 않으면 부모가 완화 치료로 바꿀 수 있다. 주된 치료나 인공호흡기를 중단하면 아기는 곧 죽는다. 갑작스러운 악화로 사투를 벌이다 죽음이 이기는 경우도 있다. 어떤 종류의 죽음이던지 아프고 슬프다. 그래서 종종 큰 소아 병원 당직은 피하고 싶기도 하다. 수많은 죽음,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일부러 죽음을 피한 적이 딱 한번 있다. 심히 아픈 아기라 미래는 없고 고통만이 존재했다. 부모는 내 동료와 상담 후 아기를 편안하게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동료는 떠나고 내가 당직을 서는 밤이 돼서야 부모는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곧 기도 삽관 튜브를 빼면 죽음의 천사가 데려갈 아기였다. 가족에게 새로운 얼굴을 디밀어 피로를 가중시킬 수도, 다른 의견으로 혼돈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비루한 미명 아래, 숨었다. 아기를 계속해서 돌보던 펠로우가 아기의 마지막을 가족과 함께 지켰다. 나는 그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아니, 그 병실에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쳤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없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치료 기여도, 가족과 친밀감 정도, 함께 보낸 시간의 양과는 관계없이 매 죽음에 슬퍼하는 내가 그곳에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했다. 너무 많은 죽음에 지쳐 성숙하지 못한 자아를 꺼내 보이고야 말았다.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죽음과 그에 따른 슬픔은 적을수록 좋지 않을까. 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너무 아파봐서 병원에서 자꾸 찾아오는 죽음에 너무 괴로워서 다른 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것도 병원에서, 신생아중환자실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어느 누구도 겪지 않으면 좋을 죽음 후의 슬픔, 그것도 내 아기의 죽음 뒤 애도의 여정을 그들과 한 걸음 같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내가 걸은 긴 애도의 길 위에서 함께 울어준 이들이 있다. 그렇기에 잠시나마 아기의 가족들과 함께 걸으며 같이 눈물을 뿌린다. 아기의 회복을 바랐던 이들이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면, 애도의 과정이 덜 괴롭지 않을까.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처럼 ‘한밤중에 길을 걸을 때 중요한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곁에서 걷는 친구의 발소리다.’ 내가 흐느껴 울 때 함께 엉엉 울어준 이들은 내 가슴속에 오롯이 새겨졌다. 덕분에 내 울음도 조금 줄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소중함을 몸소 겪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치에서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슬픔의 강에 몸을 던진다. 내가 힘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그들을 다정히 안고 같이 흘러간다. 슬픔의 강이 언젠가는 마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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