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매한 의사들이 놓쳐버린 생명들 그리고 가족들
카일Kyle과 처음 만난 순간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눈에 띄는 골격과 얼굴. 한 번이라도 카일을 봤다면 누구라도 그 장면을 나처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팔 윗부분과 다리 윗부분이 유난히 짧고 굳어있었다. 머리는 몸에 비해 큰 데다 이마가 불룩 솟아나와 있었다. 눈과 눈 사이도 멀었다. 그 사이엔 날렵한 콧대 대신 평평한 평야가 자리 잡았다. 코도 입도 작았다. 작은 입안에는 기도 삽관 튜브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여러 과와 협진이 꼭 필요했다. 피검사를 통해 유전자 검사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여러 가지 유전적 문제가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카일이 어떤 유전자 이상으로 무슨 병을 가지고 있느냐다. 비슷하게 보여도 종류에 따라 1-2년 안에 죽는 질환이 있다. 병명에 따라 발달 장애도 정도가 판이하게 다르다. 가족에게도 검사 결과에 따라 어떤 치료가 필요하고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알려줄 수 있다. 여러 가능성을 두고 상담을 계속했다. 몇 주가 지나, 드디어 검사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살 수 없는 운명은 아니었다. 하나 카일은 혼자 숨을 쉴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목과 배에 구멍을 뚫어 인위적으로만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심각한 발달 장애가 올 것임이 확실했다. 인공적인 방법으로 숨과 영양을 넣어주어야 하는 아이는 잦은 입원과 어두운 미래로 부모가 인공적인 삶을 원치 않으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유전학과, 이비인후과, 신경과, 완화치료과 그리고 신생아분과 의사들이 모여 가족과 몇 주에 거쳐 긴 상담을 이어갔다. 가족은 카일을 살리기를 원했다. 그 결정으로 바뀌게 될 가족의 삶까지 받아들인 것 같았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쳐 카일은 집으로 갔다. 대부분의 의료진, 아니 나까지 포함한 모든 의료진이 가족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다. 카일이 받아야 할 수술도 또 그에 따른 고통도 끝없이 예정되어 있었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밝은 미래가 있다면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삶의 질이 너무 떨어져 보여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몇 년이 지났다. 카일도 부쩍 자랐다. 아직도 목과 배에 들어찬 관으로 숨을 쉬고 먹었다. 목에 있는 관이 작아 큰 사이즈로 바꿔야 했다. 몇 번의 수술로 또 감염으로 소아중환자실에 입원도 자주 했다. 그럼에도 엄마, 아빠에게 웃음을 주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느냐고. 물을 수도 물어서도 안 되는 질문이다. 하지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도 내가 부모로서 경험한 ‘반짝이는 순간’을 자주 갖는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이겠지만, 크고 작은 고초를 겪어도 들불같이 번지는 카일의 웃음으로 고됨이 보람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Welcome to Holland>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의 엄마 에밀리 킹슬리Emily Kingsely가 지은 시 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게 어떤지 묻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듯한 말이다. 아니, 아름다운 울림이자 굉대한 깨달음이다. 시의 일부분을 공유한다.
아기를 기다리는 건 이탈리아로 환상적인 휴가를 계획하는 것과 비슷해요.
신나는 일이죠.
몇 달 동안 고대하던 날이 드디어 왔죠.
비행기가 도착했는데 ‘네덜란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하네요.
“네덜란드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 이탈리아에 가려고 했다고요! 이탈리아에 가는 게 평생 꿈이라고요"
당신은 네덜란드에 도착했고 거기에 머물러야만 해요. 중요한 건 구린 곳은 아니라는 거예요. 다를 뿐이지.
느리고 화려하진 않지만 네덜란드에 풍차도 있고 튤립도 있어요.
사람들은 이탈리아를 오가며 자랑할 거예요.
고통은 절대 절대 절대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이탈리아에 못 갔다고 슬퍼만 한다면 네덜란드의 아주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결코 즐길 수 없을 거예요.
한때 카일과 비슷한 상황에서 인공적인 삶을 선택한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내 아이라면 내 욕심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보내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의 실천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렇듯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없다. 아이의 상황이 다르고 부모의 믿음이 다르다. 게다가 ‘삶의 질’이라는 건 과연 무슨 의미일까. 누가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누가 감히 결정할 수 있을까? 카일처럼 큰 고통 후 어려운 삶만 남는다고 가정했을 때, 그 ‘어려운 삶’이라는 건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가 정한 기준일지도 모른다.
덧.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에게 고통이 가해지는 것은 마음이 아픕니다. 본인의 의사를 알 수 없는 데다 그 고통의 끝과 결과를 알 수 없는 아기에게 부모의 선택으로 오로지 숨만 쉬는 아기를 만드는 수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고통 끝에 저리 행복한 아이와 부모가 있다면 어쩌면 저는 그른 판단을 계속 내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끔 두렵습니다. 삶의 질을 내세우며 부모에게 아기를 보내주자고 한 우리가 수천 명의 카일을 놓친 우매한 자들인 것만 같아서요. 하지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꽤 오랫동안 의사는 객관적인 사실과 예후로 부모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를 주관적으로 결정하게 돕는 역할만을 하는 게 옳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저의 개인적인 의견을 물으면 아기를 편안하게 보내주는 것을 권고한 적도 많고요. 최근에 저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로 제가 그런 선택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시간이 내어줄 더 많은 경험과 감정으로 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요. 저에게는 무척이나 아프고 괴로웠던 경험이 다른 시각도 선사해 주어 새로운 상담 기술도 배우게 되었습니다.‘mirroring’이라고 하는데요. 부모의 몸과 마음의 언어를 읽고 소통해서 가족이 원하는 답을 제가 거울처럼 반사시켜 주는 대화의 기술입니다. 아기가 많이 아파 부모가 아기를 보내주고 싶다면 함께 공감해 주고 또 동의하는 거울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 또한 헤아려주고 어떤 결정이라도 찬성해 주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플 부모를 보듬어 주는 일이니까요. 이제는 어려운 상담을 할 때 의학적인 사실은 전하되 공감과 사랑으로 어떤 선택이든 부모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세상을 구하는 건 공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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