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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황 Jan 23. 2023

소아 중환자실의 슬픔들

신생아 중환자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이유

키가 160 cm 남짓되는 남자아이였다. 다만 몸무게가 40 kg가 채 되지 않는 깡마른 아이였다. 타고난 유전병 때문에 특별한 식이요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감기에 걸렸는지 기운이 없다며 엄마가 응급실로 데려왔다. 탁한 눈빛으로 천장과 엄마 얼굴만 바라보던 아이는 얌전히 응급실 침상에 누워있었다. 원래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아이였다. 모든 질문을 엄마가 답했다. 소아 중환자실로 입원했지만, 입원 당시 크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급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샛별이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16년 간 한 순간도 아이를 떼어놓지 못했던 엄마는 울었다. 아니, 병원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아이가 아프기만 해도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을 텐데, 아이를 보낸 엄마는 가슴이 아예 터져버린 것처럼 목놓아 울었다. 슬픔을 넘어선 감정에 소아 중환자실 의료진 모두가 울었다. 소아 중환자실 한가운데, 피에타 조각상이 그렇게 살아 울부짖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슬픈 소리가 머리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고로 죽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가족들, 특히 엄마의 반응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끔씩 머리가 터져라 부르짖는듯한 울음소리를 내뿜는, 세상을 다 잃은 그 엄마들의 얼굴에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차에 치여서, 바닷가 또는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서, 실수로 창문에서 떨어져서. 생각보다 사소한 일상 안에서 죽는 아이가 많다. 몇 년 혹은 십몇 년 동안 반짝이는 기억들을 준 아이들은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떨까. 

죽음 자체도 힘들었지만 아동학대로 아픈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다른 의미로 나를 바싹 마르게 했다. 아이를 아프게 하고 결백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사람들, 사실을 아는 내 얼굴에 뻔한 거짓말을 하는 인간답지 않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혼을 갉아먹었다. 또 그 악마의 얼굴에 대고 의사의 의무로 경과를 설명해 주는 것은 소름 끼치는 못할 짓이었다. 이 작은 아기를 짓밟아 놓고 내 앞에 서있는 온전한 악을 봐야 했다. 내 본능은 이 악에게 똑같이 해주라고 말하고 있는데 프로페셔널한 가면을 쓰고 악을 대접하고 있는 내가 미치도록 미웠다. 

나의 그릇이 너무 작아, 이런 고통을 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더 큰 슬픔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흉측하고 끔찍한 소아 중환자실을 피해 핑크빛 신생아 중환자실에 숨어 들은 건지도 몰랐다. 가끔씩 새카만 빛이 들어와도 대부분은 핑크빛으로 끝나는 신생아중환자실. 환하게 웃는 부모와 아기를 집으로 보내는 일이 기쁨인 부족한 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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