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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부버와 <나빌레라> 읽기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그것'이 아닌 '너'를 만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상대방의 깊은 내면에 있는 가장 그 사람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인정과 격려로 그것을 다져주는 일이다. -마르틴 부버


  클럽하우스를 통해 알게 된 친구분께서 본인의 인생 작품이라고 추천해주신 카카오페이지 웹툰 '나빌레라'에 설 연휴 첫날 오전 시간을 쓰기로 했다. 처음엔 '그냥 노인이 발레 배우는 이야기, 신체적 한계와 사회적 시선을 극복해내는 이야기' 정도의 감동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50화 남짓의 짧고 잔잔한 이야기가 내 가슴을 울리고 말았다. 아마 이 작품을 감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웹툰이 노인이라는 특정 계층이 발레라는 특이한 도전을 하는 이야기를 넘어 '관계'와 '자아'라는 인간 실존의 근본적 영역을 세심하게 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빌레라 제1화 中. 각자의 표정이 할아버지에 대한 향후 반응을 암시하는 듯 하다.

  70대 노인 심덕출 할아버지가 발레를 꼭 해야겠다고 가족들에게 앞에 선언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연히 가족들은 창피하다며 황당해하고, 납득 가능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극렬히 반대한다.




  때때로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심덕출 할아버지의 결심 처럼 때로는 그 목소리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갖기도 한다. 그 속삭임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남몰래 간직해온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이 삶을 뒤흔든다. 반면 여기서 용기를 조금만 더 낸다면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벅차오르기도 한다.


  자아가 네가지로 구성되어있다고 설명한 '조아리의 창'이라는 이론이 심덕출 할아버지와 우리에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다.


  먼저 다른 사람도 알고, 나도 아는 열린 영역이 있다. 외적으로 드러난 이름, 성별, 나이, 직업 등의 정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맹인 영역이다. 듣지 못한 평판이나 무의식적 습관 등이다.

  세 번째로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아는 숨겨진 영역은 약점이나 비밀, 숨겨둔 꿈과 같은 것이다.

  마지막 미지의 영역은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자아이며 탐색 및 극복되고 확장되기를 기다는 무엇인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삶을 남들이 아는 영역을 관리하는데 집중하며 보낸다. 그리고 그것을 잘해내면 사회는 잘 살았다는 평가로 보상한다. 덕출 할아버지의 70인생이 딱 그랬다. 은퇴 우편 공무원으로 마음씨 착한 아내, 번듯하게 자리를 잡은 자식들, 잘 자라고 있는 손주들까지 열린 영역과 맹인 영역에서 남부럽지 않아 보이는 삶.


  그러나 남들이 아는 영역은 자아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열린 영역과 맹인 영역에만 몰두해서 살다 보면 숨겨진 영역은 억압되고, 미지의 영역은 희미해진다. 그 스트레스를 우리는 '분주함'이라는 것으로 마취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또는 사회적 역할이 정리되며 여유로워지는 노년에 온전한 자아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덕출 할아버지에게 있어 발레가 그런것처럼 이미 늦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따라주지 않는 자연 법칙의 방해도 있지만, 더 가혹한 것은 도전을 억압하는 사회적 통념이다. 덕출할아버지의 가족들은 어느새 할아버지의 온전한 자아와 대립하는 세계가 되었다.

나빌레라 3화 中. 할아버지의 발레 인생에 대적자인 큰아들 성산

  그렇다면 마음의 소리를 따라 숨겨진 영역을 꺼내들고, 미지의 영역을 찾아나서는 자아의 여정은 관계를 뒤로 하고 독불장군이나 자연인처럼 살기로 결정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일까?

 



  하지만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오직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했던 만남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가 특정 개념을 명확히 하기위해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반대어를 떠올려보는 것일듯 싶다.


  만남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별'이다. 하지만 이별은 만남의 필연적 미래일 뿐이다. 죽음이 있는 한 언제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이별로 끝나지 않는 만남은 없기 때문이다.


  '만남'의 반대말은 '스침'이다. 우리가 길을 건널 때 횡단보도 맞은편에 있던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록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을지라도 두 사람의 자아 사이엔 아무런 작용도 없었고, 공유하는 의미도 없다. 때론 꽤 오랫동안 많은 일을 함께하고 긴 시간을 함께 했을지라도 단지 스쳤을 뿐인 사람들도 있다.


  스침과 구별되는 만남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학작품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일 것이다.  

영화 어린왕자 포스터

  어린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알게해줬던 여우는 석양이 비친 밀밭을 바라보며 말했다. "밀밭을 보면 어린왕자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생각나고, 밀밭을 일렁이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사랑스러울 것"이라고... 빵을 먹지 않기에 여우에게 있어 밀밭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간이다. 허나 어린왕자와 만남과 길들여짐을 통해 여우는 더 넓은 세상으로 자아를 확장시킨 것이다.


  결국 스침의 반대말로서의 만남이란 (이전까지는) 각자에게 한정지어져 있던 영역 밖까지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초대하는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틴부버의 대표저서 나와 너.


  스침만 있고 만남은 없는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라고 지적한 마르틴 부버는 '만남'을 위해서 '나와 너'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와 너'의 관계? 이것도 대비되는 개념을 통해 비교적 명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그것'의 세계이다.


  초반부에 가족들(특히 성산)에게 덕출 할아버지는 '그것'이 되어 버렸다. 왜 그토록 발레가 하고 싶은 것인지, 얼마나 간절한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자신들의 틀 안에 끼워맞추려 했기 때문이다. 너라는 인격체는 희미해지고, 아버지라는 대상 즉 '그것'만 남은 것이다.


  결국 '그것'은 나의 틀에 맞게 재단되면서 도구적 대상으로 왜곡된 상대방이다.  아버지를 위한다고 하지만 심덕출 할아버지 전체가 아니다. 그의 일부인 위신, 체면 같은 '것'들이 더 앞서 있다.


  반면 '너'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질 때 존재한다. 그렇기에 '너'를 만나는 '나'는 불편할 수 밖에 없다. 낯선 목표, 감정, 생각 등이 자꾸만 내 안에 들어와 익숙했던 틀을 헤집기 시작한다. 그 스트레스는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기에 상대방의 일부만 가지치기해서 내 욕망의 대상, 내 목적의 수단, 내 입장에 따라줄 기대감만 남겨서  부지불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 버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숨겨진 영역을 서로에게 꺼내보일 용기를 낼 수 없다. 또한 나도 너도 모르던 미지의 영역은 '나'의 안에 들어온 '너'가 확장 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에 불편함은 자연스러운 성장통으로 받아들여야한다.


  그렇기에 '나와 너'의 관계를 통해서라야 '스침'이 아닌 '만남'을 이룰 수 있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레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 할아버지가 찾아가게 된 문경국 발레단에는 부상과 매너리즘, 경제적 어려움에 함몰되어 성적이 부진한 발레 유망주 채록이 있었다.


나빌레라 5화 中. 어깨가 축 쳐져있는 유망주 채록


  처음엔 입단을 완곡히 거절했던 단장도 밀어낼 수 없는 덕출 할아버지의 집념과 노년에 어울리지 않는 체력에 놀라고, 채록이가 감화되길 바라는 마음에 할아버지를 채록이의 매니저이자 제자로서 엮어놓는다.

나빌레라 7화 中. 덕출 할아버지의 귀여움이 이 웹툰의 감상 포인트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노인사회의 벽에 부딪혀 꿈을 잃어버린 젊은이의 동행, 그 삐그덕 거림은 처음부터 위태롭고 불안했다. 덕출 할아버지는 채록을 볼 때마다 자신의 무력함에 계속해서 작아졌다. 채록은 몸도 따라주지 않는 덕출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답답했다.


  그랬던 에피소드가 진행되어가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내 부족한 글로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훈훈하기 그지없었다. 혹시~ 아직 웹툰을 안봤으면 꼭 보세요. 두번 보세요.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직면한다. 할아버지는 발레를 어디까지 하고 싶었는지 알게되고 자신이 할 수 있을지 두려움을 느껴갔다. 채록은 끝이 보이는데도 포기하지 않는 할아버지에게서 늘 핑계를 향해 도피하기만 해왔던 스스로를 반성한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서로를 향해 새로운 사람이 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할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채록에게 대신 맡기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을 극복하게되고, 채록은 자신의 일생일대의 중요한 기회를 걸고 도박을 할만큼 할아버지의 발레를 향한 꿈을 사랑하게 된다.


두 인격의 만남은 화학물질의 접촉과 같다. 반응이 일어나면 양측 모두 성질이 완전히 변하게 된다. -칼 융




나의 시절은 너를 만나 다행이고, 우리를 만나 꿈만 같구나.

  덕출 할아버지와 채록은 마침내 날아오르는 꿈을 이룬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와 너가 되면서 둘의 꿈은 하나의 '우리'가 되었다. 그 마지막 장면의 감격이 내 가슴에 끊이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 작품이 3월엔 드라마로 찾아온다고 한다. 진실된 관계의 회복을 통해 노인과 청년들이 다시 꿈꿀 수 있는 세상이 열리도록 내가 얻은 것과 같은 감동의 물결이 널리 널리 퍼지길 기원한다.

작가의 이전글 <이태원클라쓰>에서 '니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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