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축복하지 마. 네가 불행하니까.”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 깊숙한 곳을 덮어버렸다. 나는 친구의 기쁜 소식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지금 내 삶이 조금 기울어져 있을지라도, 누군가의 반짝이는 순간 앞에서 따뜻한 말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건 벽 같은 말이었다. 마치 내가 그 사람의 행복에 흠이 되는 존재라도 되는 양, 조용히 밀려났다.
그때 떠오른 문장이 있다. “불행은 전염병이다. 불행한 사람과 병자는 따로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말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삶의 조언처럼 내뱉는다. ‘끼리끼리’, ‘초록은 동색’ 같은 말처럼.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과 어울리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끼리 모인다는 그 흔한 구분. 그런 말을 들으면 문득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래서 내가 힘들 때 다들 날 피해간 걸까? 내가 그렇게까지 감염원처럼 보였던 걸까?
나는 내 삶이 불안정하고 초라하다고 느낀 적이 많다. 가족 중에서도 내가 제일 못난 사람 같았고, 명절이면 내려가지 못한 핑계를 대며 침대에 몇 시간이고 누워 있었던 날도 있었다. 친척들 앞에서 “다 잘 지내요”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그 웃음은 오히려 내 안의 안쓰러움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 그런 내가 친구의 자랑을 듣는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잘됐으면 좋겠다고, 더 나은 삶이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 마음보다 내 상태를 먼저 보았다. 내 감정을 의심하진 않았겠지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는 분명했다. 불행은 정말 전염되는 걸까?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꺼져야 할 존재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혹시 나도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시절, 누군가의 불행을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건 아닐까? 그들의 삶을 돕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 불행을 감당하지 못해 슬며시 선을 그었던 건 아닐까? 그럴 마음은 아니었는데... 그 말이 마음속에서 계속 맴돈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이 전염된다고 한다. 감정 감수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타인의 감정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만 전염된다는 건 곧 감정이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니까. 그게 두려워 사람을 피하는 순간, 우리는 관계 속에서 나아가는 법이 아니라 단절 속에서 안전해지는 법만 배우게 된다.
불행은 전염병이 아니다. 그 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라, 그걸 멀리하라고 말하는 태도가 위험하다. 불행을 전염병 취급하는 순간 우리는 사람의 마음이 아닌 ‘상태’만을 보고 판단하게 된다. 아픈 사람을 밀어내고, 우는 사람을 외면하고, 흔들리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과연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도 누군가의 자랑을 듣는다. 그리고 여전히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 삶이 흔들릴지라도, 누군가의 기쁨 앞에서 따뜻한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 내가 조용히 흘리는 눈물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함께 앉아주는 사람이 내 곁에 와주기를 바란다.
누군가는 말한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이 나이 먹도록 불안정하게 산다고. 어떤 이는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게 불안하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그저 부럽다고 말한다. 다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오늘처럼 내 불행을 전염병처럼 여기는 시선 앞에서는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