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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학이지지 Oct 02. 2020

0개 국어

  한국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0개 국어라고 한다. 갑자기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한국어 지문 또는 상대방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활용하지 못할 때의 한국어 능력 저하 상태를 말한다. 해가 지날수록 나는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0개 국어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 모국어는 한국어인데, 이상하게 평소 쓰던 단어도 갑자기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고, ‘의성어’, ‘의태어’로 대체해 말해 주변을 놀라게 할 때도 있었다. 갑자기 ‘도장’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팡팡이’라고 말하거나, 블라인드가 생각나지 않아 ‘발발이’라고 말했다. 제일 심각하다고 느껴졌을 때는 과일 ‘배’가 생각이 나지 않아 ‘명절에 먹는 사각사각’이라고 말한 것이다. 강아지는 멍멍이, 고양이는 야옹이, 쥐는 찍찍이, 과자는 까까, 더럽다는 지지, 혼나기는 때찌, 소변은 쉬-, 양치는 치카치카, 그리고 새 신은 꼬까신. 이것은 분명 유아어였다. 한동안 충격에 휩싸였다. 


  어느 순간 회사 동료들도 직인 날인을 직인 팡팡이라고 말할 때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굉장한 위기의식이 들었다. 나는 자각적으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국어가 한국어라고 한국어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되었다. 최근 상사가 내 글씨를 못 알아보겠다고 했을 때는 심지어 ‘글자 쓰기’에 대한 위기 의식까지 들었던 나였다. 인생에 모든 공부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끝난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나는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를 다시 시작했다. 스피치 모임에서 듣기와 말하기를 다시 시작하고, 틈날 때 마다 글씨 교정 교본에 글자를 따라 쓰고 있다.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스피치와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한 때는 영업과 글쓰기에 대한 꿈도 있었던 나였는데, 머릿 속이 검게 변했다.


  왜 갑자기 0개 국어가 된 것일까? 특정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현상을 블로킹 현상이라고 한다. 이는 우울증에 걸리면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았을 때 기억력이 무서울 정도로 나빠진다는데, 작년부터 그 심각성이 커졌으니 일리 있는 말 같았다. 


  어느 순간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찾기보다는 상황의 흐름에만 집중했다.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문맥을 통해 짐작하라고 훈련 받았던 수능 교육은 사회생활에 적합한 교육 방식인가 싶었다. 그 ‘짐작’이라는 훈련은 곧 ‘눈치력’을 의미했고 0개 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생존력을 키운 것이 아닐까.


  머릿 속 생각만이라도 제대로 말하고 싶다.

  내가 본 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조심스레 단어장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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