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학거사 Nov 23. 2021

욕망의 끝은 섬뜩한 종말일지니..

쑨원(孫文)은 청나라 황제를 보위하는 보황파를 향해 널리 알려진 사마천의 문장을 압축해서 “천하대세는 크고도 세차니 순응하는 자는 창성하고 거역하는 자는 멸망한다.”로 일갈했습니다. 시대마다 성인(聖人)들은 시와 때에 관한 “시대분별”을 외쳐 왔으며, 이는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며, 시와 때를 분별하면 천하대세를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으며, 자연 질서를 따르면 창성하고, 어기면 망한다는 통찰로 이어지게 됩니다. 요즘은 가까운 나라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는데, 중국판 노아의 홍수로 계엄령까지 선포되었으며, 하늘이 중공을 멸할 것이라는 “천멸중공”을 외치며 인민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건만, 3억 6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중국공산당 3대 조직(당, 공청단, 소년선봉대)를 탈퇴하며, 인류의 공적 중국공산당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중공의 황제 시진핑은 티벳을 방문하여 동원된 군중을 통하여 자신의 전용차에 흰색 “히타”를 던지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티벳의 환영의식이라 하지만 중국 전통의 시각에서 보면 영구차가 지나가는 장면으로 각인됨에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습니다.


믿는 자로써 보면 코로나의 근원지로 교회를 파괴하고, 장기 밀매는 고사하고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자들의 말로는 지켜볼 따름이지만, 우리는 유대 땅을 치리하던 지도자들을 향한 약 이천년 전 성자 예수님의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못하느냐”며 시대를 분별했으면서도 시대가 요구하는 그 길을 따르지 않고 현실과 권력과 핍박이 두려워 눈치를 보며 구시대 편에 서서 새 시대를 핍박해야 했던 어리석은 지도자들 내지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을 향한 책망과 질책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가운 예수님의 질책과 책망을 승화시켜 그 속 깊은 의미와 뜻에는 “어느 때인가?는, 절대적인 시와 때가 도래할 것을 위하여 미리 준비” 시키시는 것으로 당연한 순리와 섭리에 따라 올수 밖에는 없음에 그 이치를 깨달으라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창조 역사에 있어 인간들이 당연히 이루어내야 하는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점검은 필수적이나,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단순하게 사랑으로 봐주셔야 하며, 다음에 하면 안 되나요? 라고 할까봐.. 단단히 준비케 하시고 예비하시게 하심의 깊은 뜻을 우리는 가슴으로 받아내야 그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다양한 측면에서의 그 시와 때에 맞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역”을 위한, 이곳저곳에서 경고와 책망의 나팔소리를 내고 계심도 인지 못하거나, 아님 귀를 틀어 막아버리며, 아님 보지 않으려 눈을 돌려 외면해 버리는 노아의 때처럼, 롯의 때 그의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여기며, 소홀히, 등한히 여기는 모습이 될 것임까지도 미리 예지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의 때와 시를 깨어 기다리며, 기름 준비에 관심이 집중되는데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안된다 라고 하는 자세로 더 매달리며 더 뜨겁게 사모하시기를 당부에 당부하심에 녹아있는 그 애타는 심정을 만의 하나라도 흘려버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창조를 통한 하늘나라가 설정한 모든 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들은 그 시와 때에 맞게 성취되었으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은 곧 이루어질 것으로 그 마지막의 결말로 종결됩니다. 따라서 그 시와 때에 걸 맞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은 기존 인간들의 현실적 세계관과 종교관으로는 접근 자체가 불허하게 되기 때문에 피토하는 심정으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을 두드리시며 외치시고 계심은 참여 자체가 너무나 거룩하고 고귀한 영역이기에 개나 소나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일도 자만을 지니고 쉽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 인데.. 하물며 창조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새 창조는 예전 것의 종말을 고하며 옛것과 새것으로 명확한 구분이 요구되므로 대충이나, 그냥 그대로는 넘어갈 수는 없기에 “심판”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시며 각 개인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십니다. 새것과 옛것을 가름하는 경계에는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고 습관적으로 일관해온 형식과 절차는 적용이 불가할 수 있음에 주님께 매달려 은혜주시기를 갈망하므로 주께서 새로운 시공간 안으로 푹 싸안아 주심으로 새것으로의 점진적 변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영이신 주님이 통치해 나가실 새 하늘과 새 땅은 각 개인들이 이룩한 새 성전으로만 진입이 가능할 것이므로, 같은 세상이라 하드라도 기존적인 현실관이나 종교관으로는 아니되며, 새로운 현실 안으로 다시 오실 영이신 주님께 합당한 변화된 모습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모르면 당하는 것은 당연하며, 눈뜨고 있어도 코 베어간다고 하는데.. 세상에 팔려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려 변명으로 일관하며 입으로 발라 마치며 명분을 끌어 모아서는 안 될 것으로 욕망의 끝은 섬뜩하며 으스스하여 싸~ 함을 잊지 말고 힘들어도 애써 찾고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믿음의 변증적 접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