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학거사 Nov 23. 2021

고리타분한 그리스도인..

동아닷컴 [맞춤법의 재발견] 칼럼에 연재된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학과 교수의 글에는 “고리타분을 골이 따분한”이라고 표현하는 맞춤법 개그가 나옵니다. 더불어 골이 따분하다 라는 말 자체에 인상을 찌푸릴 필요는 없으나, 이 개그의 또 다른 재미적요소로 “새롭지 않고 답답한 성격”은 우리를 따분하게 한다는 직설적 비판이므로, 덕분에 맞춤법 논의에서 오가는 고리타분한 말들이 누군가를 따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물론 “개그는 개그일 뿐”이므로 “골이 따분(×)”이라는 개그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면, 한바탕 웃은 후에는 실제로 그 안에 든 의미들을 짚어가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일갈합니다. 우리는 “고리타분하다”를 대개 “하는 짓이나 성미, 분위기 따위가 새롭지 못하고 답답하다.”라는 뜻으로만 사용하지만, 그런데 실은 이 뜻은 파생되어 나온 두 번째 뜻으로 첫 번째는 “냄새가 신선하지 못하고 역겹게 고리다”로 두 번째를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리타분의 사촌격인 구태의연함(옛 모습 그대로임)에 내포된 부정적 의미는 시간은 흘러가는데도 전혀 발전과 변화가 없는 모습을 가리킴의 표현에서 신선한 변화를 추구함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신선한 변화를 추구함에 따르는 큰 기쁨은 그냥 그대로의 존재함에 있지 아니하고, 변화를 추구하려는 자세와 태도에 따라 진일보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음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저 힘들고 싫어서 신선한 변화 추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과 응전이라는 측면에서 따라오는 자신 스스로의 성숙도를 느낌이 아닐까? 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변화는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급진적 가속력을 지니게 되며, 점진적으로 행하여지는 응집력의 확대를 통하여 기존적 고유의 한도를 넘어설 수 있는 파워를 생성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유‧무형의 근본적이며 질적인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과 이행을 통한 새로운 경험과 더불어 장성한 분량의 합목적적이며 합법칙적인 발전과 비약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한도 끝도 없이 발전되어 나가는 것의 엔진으로서 성장동력을 무한히 발산하기 때문임을 생각해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의 추구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육체가 존재하는 물질계를 넘어 영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에센스(성품·스피릿·영·영혼) 또는 존재들이 거주하는 비물질적인 세계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 바탕이 됨의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무한광대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게 세상을 접해서는 아니됨에 가장 걸림돌은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안 돼!”를 외쳐버리면, 행동의 경직성으로 굳어져 버리거나 더 이상의 역할이나 영역적 접근이 아예 싹이 잘라져 단절(절단)되어 버리므로 그에 따르는 지속적 결과에 따르는 그 무엇은 기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어눌하지만 이러해서 이러하고 저래하여 저래 하므로 네가 판단하여 결정하라고 한다면, 당장은 멈칫 멈칫할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방법이나 창의적 발상으로 새로운 영역에서의 색다른 경험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멀리까지 볼 필요 없이 믿는다 한다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위험하니 아니된다 라고 하는 불문율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래하면 이래 걸리고 저래하면 저리 걸려 뭐하나 제대로 마음 놓고 생각해 볼 수조차 없도록 얼기설기 엮어 놓아 도망가기도 그렇고, 참석 안하자니 뭐하고 참으로 구조적 모순은 그렇다 하드라도 난맥상의 상난맥상으로 솔직히 까놓고 논한다면 “개판”이라 표하는 것이 맞지 않나?를 생각케 됩니다.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보화라 말씀하시는데, 뭐가 두려워 고리타분하게 사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보내시어 경험케 하시분도 주님이실 것이고, 나를 건지시어 회복시키실 이도 주님이실 것인데.. 뭘 믿고 뭘 듣는지? 아님 말씀으로 파고들어 주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시도록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래저래도 안 된다면, 해아래 새 것이 없으므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으니,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는 차치하고 환도 뼈가 부러지고,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든가.. 허락없이 옷자락(바지가랭이)을 잡고 늘어져야 할 것입니다. 고리타분하게 은혜로운 오늘이 좋고 내일도 좋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기보다는 뭐라도 변화를 위한 자신의 애절함에 표출되는 행위가 어떠한 측면에서라도 이루어지면 중심을 보시기에..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 하시지 않겠나?를 생각해 봅니다. 그저 고리타분하게 Copycat(주인을 따라하는 고양이처럼 그저 모방만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주님께 Copyright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지? 는 개인의 선택과 태도, 노력의 여하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노예들의 합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