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학거사 Feb 26. 2024

푯대로 향함속의 세렌디피티...

지난 일요일 예배 후 우연이라 하기에는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당연하다고 할 수도 없는.. 좁은 소견으로 스스로 이해낼 수 없는 경우를 갖게 되었는데, 그동안 험난한 푯대로 향함에 따르는 초자연적인 파워가 아닐까? 라는 생각과 생각이 지금도 떠나가질 않습니다. 혹시? 평범한 일상 속에 나타난 무한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섭리가 아닐까? 라는 말미암는 말미를 지니게 됨에는.. 우리의 삶 일상에도 하나님이 우연히 주시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들이 당연하게 경험되어지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유지함에 따르는.. 우리네 인생에서 우연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당연한 귀결이라 표현함이 바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은 자신만의 한 세상을 살아내며 우연보다는, 현실적인 당연함만을 강조함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섭리하심을 인간 영역의 편향적 해석에 따르는 접근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한편, 세상만사 우연인 것 같기도 하며 아닌 것도 같기는 하지만, 속내를 뒤집어내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따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과 뜻, 섭리와 경륜 안에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 스스로 경험한 상황을 “푯대로 향함속의 세렌디피티...” 로 적어보는 이유는 분명 주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으로.. 어떠한 이유와 목적에서든 간에 인간적 입장과 상황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의도되지 않고 우연히 얻게 된 행운을 가리키며,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에 사용하는데, Luck/Chance가 비슷한 뜻은 되지만, 상황에 따라 나쁜 결과를 낳거나 초래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게 사용되며, 실제로 외국인들은 이 단어를 멋있는 영어단어라고 인식한답니다. 본 단어의 일반적 유래로 우리가 미처 찾을 생각도 못하고 있을 때, 조용히 다가와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우연함을 “세렌디피티”이라 한다면, 이 기회를 얻은 운 좋은 자는 최소한 자신이 발견한 것의 창조적인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생각의 폭이 좁은 사람, 즉 하나의 목표 외에 다른 것은 배제하고 엉뚱한 곳에 집중하는 사람에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므로, 스스로 지금 당장은 전혀 상관이 없고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도 관심의 영역으로 넓히고 그 속에서 중요한 무엇인가? 를 눈여겨보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믿으며 각성해야하는 부분에 있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룸은 당연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함으로 따져보면..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은혜가 그저 넝쿨 채 굴러들어오는 호박 덩어리인 “우연찮은 대박”이라고 한다면.. 저는 자연인이 되어 산속에 처박혀 유유자적히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입장에서의 “하나님 중심적 세렌디피티”는 성경속의 룻을 통하여 그 단어적인 의미를 초월한 그 무엇은 어떠하다는 것임을 자세히 밝혀 주시고 계십니다. 룻은 자신의 인생에 주어지는 결과만을 기대하며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고 세상을 열심히 살아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의 과정을 감당해 나갔음에 따르는 원인적 결말로 믿으므로 세상에서 충실하였고, 그 결과 놀라운 하나님의 세렌디피티를 놓치지 않고 움켜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치 않고, 그저 자신이 아는 것만이 옳다하며, 게거품을 뿜으며 침을 튀기므로... 말씀으로 보면, 보리 추수 때 하나님께서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발걸음을 인도하셨고, 마침 그때 늘 자기 밭에 머물지 않던 보아스가 베들레헴 성 안에서 자기 밭으로 나와 룻을 보게 되므로 역사를 이룸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난해한 마지막 때의 세상 속에서 그냥 그대로 시계추와 같은 패턴으로 내가 옳으니 그리니 해본다 한들 룻과 같은 은혜는 이루지 못할 것으로..  스스로의 한계 지님은 장애물이 될 뿐일 것입니다. 당연한 귀결로 가라면 가고 앉으라면 앉아야 하는 절대적 순종이 제사보다 낮다 하심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인도하심으로 룻이 “우연히” 가게 된 곳이 보아스의 밭이었고, “마침” 그때 보아스가 자기 밭에 와서 룻을 만나게 되었고, 둘은 결혼하여 마침내 룻은 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가업을 이어나가게 되었음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룻은 자신이 메시아의 조상이 된다함을 알지 못했지만, 그저 순종을 따라 최선을 다하는 그 일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루시는 세렌디피티를 통하여 구속사적 역사 속에서 중요한 다윗왕이 태어났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됨이 이루어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룻기라는 구약성경 속의 작은 책은 역사서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엘리멜렉과 나오미 사이에 탄생한 이방인 중의 하나에게서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은혜가 그녀의 인생에 다가왔음을 믿는 자 우리 모두는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고 마지막 때를 위해 살아 있으므로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하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세렌디피티는 결코 요행이나 행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최선을 기대하며 룻 역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열정을 다 쏟아 놓아야함을 다시 한번 상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세상으로 향하였으며, 그 일상을 치열하게 살았음에 대한 의미를 지녀야 할 것으로 기도의 잔과 앞으로 치고 나가는 진격의 잔을 채워 들어 올리며 승기를 다져야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적 관점에서 보면 룻기는 이방 여인 룻을 통해 사사시대의 암울한 역사 속에서도 신앙과 혈통의 계승이 일어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으며 네 장으로 구성된 짧은 룻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경륜을 잘 보여줍니다. 룻과 보아스, 나오미의 삶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어떠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그런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룻기 속에 흘러넘치는 하나님 아버지의 속내 깊으심을 마음으로 받아내, 그저 믿고 따르므로 구원을 이룸이 어떻게 구체적인 손길의 은혜를 통해 지속되는지에 대한 그 과정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으로 보여줌에 대한 의미를 자신의 삶속에 녹여내 피와 살이 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경직된 교회생활에 따르므로 소홀이 해나가는 받아냄의 법칙을 룻기를 통하여.. 그 자체는 믿음의 푯대를 향함이요 그 속에 따르는 연단과 고난은 독배와 같아 될 수만 있다면 잔을 무르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이 동반되지만, 그에 따르는 영원한 생명에 따르는 결과치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값진 증거들을 이루는 과정은 롯과 나오미, 보아스와 주변 사람들이 경험했던 내용과 같음으로 오늘도 지속되고 있으므로 우리도 구원 역사속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잠시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속의 평범한 일상 속에 나타난 비범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빗어지는 세렌디피티로 텅빈 상태로 모압에서 돌아온 나오미의 삶에 룻과 보아스의 만남과 하나님의 섭리, 또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을 통해 놀랍게 섭리되었음을 믿고, 하나님의 해피앤딩을 믿는 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가 지속적으로 임하여 주실 것을 기대하고 갈망하여야함은 매우 당연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AI기반의 설교 로봇(?)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