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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Mar 09. 2024

강요 차원의 이중적 모순

일찍 자리에 들고, 새벽기도 시간을 갖으매 너무도 어려운 “아멘”에 관한 이중적 겹치기 모순이 생각게 되므로 자리에 다시 눕지 못하고 허여케 밝아오는 창을 바라보며 왜? 라는 관점에서 자료를 찾다보니.. 아~ 그리하구나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시대에 맞는다고 하기보다는 말씀중심으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믿는 자들의 사고와 행동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영역과 잘못 인식된 잔재가 있다면 과감히 탈피하고 털어내 바름을 찾아야 하지만, 그냥 그대로라면 말씀으로 제시된 중심축과는 분명 큰 오차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 작고도 작은 비스므리하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작은 오차(류)는 오랜 시간을 이루며 사뭇 이중적이고 강한 모순을 이루지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을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너무나 좋고, 좋아 보이고 보는 것이라도 말씀 중심으로 되돌려 그 역할 인식에 따르는 결과를 재조명해볼 필요는 다분할 것입니다. 이는 트리즈(TRIZ)의 가장 핵심이자 기본이론인 “모순과 이상성”에서 트리즈가 제시하는 모순은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맞지 않고, 논리의 앞뒤가 맞지 않다” 하므로 이상적인 형태로의 전환과 변화를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논리적인 모순은 상식적 의미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다는 것이지만, 믿는 자들로서는 상식적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인 차원까지를 포괄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말씀중심으로 구별하여 올바른 사유를 위하여 정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양의 지식 체계적 교육의 영향으로 형식적 논리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변증법적(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설명하려는 논리) 기반에서 그 본질에 대한 의미적 측면을 통하여 실용주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하는 입장에서의 모순이나 이율배반은 논리적·사실적으로는 근거가 대등하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로 모순과 이율배반이 생기는 건 모두의 기준을 앞세우며 질서와 조직의 유익을 위한다 라는 명분으로 활용될 때 발생하며, 그리하므로 분명한 것은 모두를 위한 조직의 입장이 우선시 되므로 함께 하는 자들의 입장은 무시(축소)되는 자가당착에 봉착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넓고 무한광대 하여야 할 창조의 역사를 넓음보다는 함께하는 모두를 한 곳만을 바라보고 응시하게 만드는 근시안적 입장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 너와 나 그리고 창조역사 속의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는 그 차제를 지향하여야 됨에 있어 국한된 재단으로 가르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물론,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하므로 옳고 바른 것 같기도 하겠지만, 절대적 입장과 익숙함 사이의 이중적 구조는 단순한 모순을 이루는 것조차 파악하기 어렵지만 사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표현 불가능한 무서움이 내재할 수도 있다함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모든 암적 존재는 내부에서로부터와 미약하여 인지 못함에서 그에 대한 대처가 없거나 부족함에 큰 일로 전환되게 됨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믿음을 이루어내는 자와 가르치고 양육해야하는 역할 인식에 있어 무조건 따라야 함이 아닌 말씀 중심의 규범적 차원과 믿어야만 하는 현실적 입장에서 바른 역할을 이루어야 하지만 가르치고 이루기 위해 모인 자들로 인해 따르는 역할 모순(Role Incompatibility)은 분명 존재할 것이고, 이를 걷어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함에도 모르거나 알면서도 편익을 위해 그대로일 경우는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규범과 현실세계의 편익을 구별 짓는 프레임으로 작용될 수 있을 것으로, 이중적 모순이라기보다는 바른 믿음을 위한 깨끗한 환경에 관한 정체성을 이룸으로 모순을 끌어안는 실수는 범치 않게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바르게 갖기 노력하며, 할 수 있다면 불편을 감수하고 진정으로 봉사하며 따르려 무진 애를 쓰지만, 그 속에 그 모든 것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과감히 벗어던져야 그에 따르는 심각한 폐해는 미연에 방지될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현상학의 목표를 현상학적 환원과 생활 세계 결합에 두는 세상을 괄호로 묶어 성찰로부터 배제하는 일과 동시에 사고 분석에 세계를 포함시키는 일이다.” 라는 메를리 퐁티는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일이지만, 퐁티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며. 정신은 참된 것을 소유하려고 대상을 규정하면, 지각의 질서는 단순한 외향만을 이룰 뿐이다.“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해보자며 열심을 내는 것들이 알게 모르게 또는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보쌈이 되어 함께 한다 라고 하는 명분하에 잘못하면 물질의 왕이나 사탄에게 간구한다는 서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강요 차원의 이중적 모순인 역할 모순의 주제로 제시되는 “아멘(Amen)”은 구약에 30회, 신약에 131회 사용되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로 “창조주와의 서약 Endorsement"의 아멘은 구약에서는 ”신의 축복 Bless와 저주 Curse”의 의미로 신약에서는 “진실한, 진정한 Rtuly, Vfeily, Ament to that 간구하는 기도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멘은 기독교 예배에서 말씀에 동의하거나, 감동을 나타내거나, 기도의 응답으로 사용되며, 아멘을 하는 것은 믿음에 따라 결정되는 개인의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는 아예 없거나, 드문드문 하지만 강력하게 요구되며 안해서는 아니 될 정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있을 정도로 고르지 못하게 사용되는 아멘은 기독교인 71%가 어떤 느낌인지만 알고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를 향해 가는 과정 속에 믿음에 발전에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종교와 삶은 따로 가 아니므로, 좌우로 요동치지 않고 처음부터 한쪽을 가리키는 나침판은 분명 고장난 나침판이 분명할 것으로 익숙하드라도 더 바르고 옳은 방향으로의 전환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고귀함을 지닌 여성이 인기 있음과 같이 아멘을 씀에도 품격과 결을 높여야 할 것으로.. 분위기 타지 마시고 재물 마귀에게 충성하는 듯 축복에 함몰되어 남발치 마시어 아껴두었다가 아래 찬송과 같이 중요하며 거룩한 그 곳에 충만케 사용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임재 앞에 고요하게 엎디어, 주의 말씀 들으려고 기다리옵니다. 무슨 명령 내리셔도 아멘 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한 선물은 아멘뿐이 옵니다. 주에 뜻에 불합당한 그 무엇 있습니까? 지금 명령 하시면은 청산하겠습니다. 무슨 명령 내리셔도 아멘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한 선물은 아멘뿐이 옵니다. 주님 은혜 받는 일에 장애물이 있으면 주여 말씀 하옵소서 처분하겠습니다. 무슨 명령 내리셔도 아멘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한 선물은 아멘뿐이 옵니다. 저의 기도하는 중에 거리낌이 있으면 주여 책망 하옵소서 자복하겠습니다. 무슨 명령 내리셔도 아멘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한 선물은 아멘뿐이 옵니다. 거짓됨과 교만이나, 시기, 음란, 사치를 주여 지적 하옵소서 회개하겠습니다. 무슨 명령 내리셔도 아멘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한 선물은 아멘뿐이 옵니다. 제게 있는 물질이나, 재주 기능이라도 주님 요구하시면은 지금 바치옵니다. 무슨 명령 내리셔도 아멘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한 선물은 아멘뿐이 옵니다. 제게 있는 모든 일절 전부 주의 것이요, 저의 목숨 그것까지 달게 바치옵니다. 무슨 명령 내리셔도 아멘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한 선물은 아멘뿐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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