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학거사 Apr 01. 2024

피동성과 폐쇄성에 따르는 저해요인

피동성 표현에 관한 논문의 말미에 “되다, 받다, 당하다”를 대상으로 분석해 놓은 것들을 살펴보면, “일정 상태의 완성, 외부로부터 영향이 미쳐 옴, 원치 않는 상황에 직면함”으로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참으로 많은 모순에 직면하거나 되지도 않는 논리를 앞세워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내세우려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진정 말씀을 주시지 않으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옴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동”의 개념에 있어 같은 사건이나 상황이라도 화자가 어떤 참여자의 관점에서 그 사건을 관찰하고 인식하였느냐에 따라서 행위자인 화자의 관점에 따라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화자의 인식과 판단에 따라 그 화자의 관점이 반영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잘 관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관리 위주로 진행되는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폐쇄성은 태도나 생각 따위가 꼭 막히거나 막히어서 외부와 통하지 않는 성질을 뜻하며, 어떤 영역이 선이나 막으로 둘러싸여 닫혀 있음으로 외부와의 단절과 절단된 상태이므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로 집착적 상황인 은폐적 기반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골 아프게 이런 논제를 제시함에는 교회만 갔다 오면, 피곤이 극에 달하므로 남들은 좋아 죽겠다고 얼굴이 펴지겠지만, 저는 왠지 모를 피동성과 폐쇄성에 따르는 자유함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은 아닌가? 하며 은연중 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로 “교회”에 대한 개념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추상적 개념), 또는 그 장소(공간적 개념)로 교회 자체라는 표현을 나열해 보면 지하교회, 가정교회, 카톨릭/개신 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더불어 장로/감리교회, 침례/재림교회, 구세군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등과 몰몬교회, 여호와의 증인교회, 이단을 대표하는 교회와 신흥교파 교회가 존재함으로 진정 어지럽고 순수 그 자체가 남아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분파를 거듭함에 따라 전 세계에 2만 개 이상의 교단이 있으며, 교파마다 교리도 다양하지만 20세기에 들어 기존의 신학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는 자유주의 신학, 해방 신학, 기독교 근본주의 등의 신학들이 영향력을 지니며 갈라진 교파들 간의 간극은 하나로 이룰 수 없는 상태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11세기 교회의 대분열과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한 개혁 지지파는 개신교회로 분리되어 여러 개의 교단으로 구성되는 교단 교회가 되었고, 개혁 반대파 제도권 세력은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성경의 해석에 대한 논란, “면벌부”(대사)의 폐단 등으로 논란의 중심을 이루어 종교개혁 찬성파와 반대파들은 격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과 같은 종교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으로 각자는 각각의 자체적 성을 쌓고 스스로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할 수밖에는 없었음에 현재의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충만할 것이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는 것이 바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교회에 대한 네거티브적 관점에서 싸잡기 위함이 아니라, 왜? 교회에만 가면 피곤해 지는가? 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근원적 접근을 진행해 보니, 이는 쓸데없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임무와 기능에 충실해야함의 교회가 이리 찢기고, 곳곳이 누더기를 이룬 상태에서 스스로 아무리 고귀하고 거룩하다 짖어댄다 한들 형편없음에 당신의 존귀한 이름을 허하심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며, 더욱 골 때리는 것은 그 자체의 혼란을 넘어서는 교인들의 피동성을 조장하는 목회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어가며 오직 바라보아야할 것은 오직 주님밖에는 없으므로 스스로의 교회 봉사와 직분은 당연시 여기며, 피동성과 폐쇄성에 함몰되어 주어지는 은혜가 크다 여겨서는 절대 아니 될 것입니다. 영의 성장의 자양분을 이루는 유기물의 무기물화의 생태적 기반에서 릭조이너 목사님의 우려 섞인 음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교회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모든 것의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 요약되어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두신 온전하신 뜻은 그들이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한 모형이 아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모형이시다. 우리가 속임을 당해 그리스도를 향한 순박한 헌신, 교회나 교리에 대한 헌신이 아니오, 주님의 종들에 대한 헌신조차도 아니다. 주님 자신에 대한 헌신을 빼앗길 때마다 우리는 길을 잃고 만다.”라고 함에 대해서 말입니다. 더불어 달라스 윌라드라는 학자는 오늘날 교회에 예수님의 피만 조금 원하는 뱀파이어 교인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고 천국 가기만을 원한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인 교회에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임재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세상에 역사하는 마귀와 악한 세력과 싸우게 하셨으므로 믿는 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함께 악한 세력을 다스리는 그런 권세를 함께 행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세상의 풍요와 번영의 신에게 충성하니 교회가 부활의 생명과 능력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은 진정 오늘날 이 사회의 근본 문제라고 볼 수 있으므로 부활의 공동체인 교회가 부활의 생기로 살아나야 세상이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불의와 모순이 가득한 세상을 보면 주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는 사실에 의문이 들 때가 많으나, 주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신다면 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일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아직 이 세상은 마지막을 이르지 않아 죄와 사망의 권세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으므로 악한 영이 주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세상 사람들과 위정자들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악한 영과 세력도 주님의 컨트롤 통제 아래에 있고, 주님이 계시므로 세상이 이 정도 유지되므로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선하고 지혜로운 다스림을 신뢰하며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푯대가 되고 그분의 말씀만으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야 할 것으로 교회의 크고 적음과 직분과 봉사, 교제 또는 목회자의 어떤 신학적 사상, 이론과 교리, 능력이나 은사 이런 것에 현혹되는 것은 모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교권주의자, 교리 및 역사학자들의 전철을 밟게 되고 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는 눈 먼 인도자를 따라 그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는 길이므로 자신을 비우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복과 영혼의 만족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혼란의 극치를 이루고, 인위적인 가르침이 난무하는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 믿는 자 모두는 어떠한 가르침과 푯대를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심도 있게 하여야만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믿는 자로써 내부 총질하는 것이 아닌, 세상사에서도 모든 문제는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므로 내부를 다져보는 입장과 주위를 돌아보아도 답답함을 이룸에 거룩한 분노로 짖어댈 뿐이므로 스스로들 다름도 있다 생각하시고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크게 떠야 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리새인 및 사두개인, 역사학자들이 아닌 성경의 “나실인”과 같이 이 마지막 때는 야훼 하느님에 대한 헌신을 서약하는 것도 너무나 좋은 시점인 것 같기도 합니

작가의 이전글 영의 차원과 현실적 입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