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가 사는 지역의 주민자치센터에서 월 20시간 정도의 봉사를 하고 있으며, 헬스장을 관리하거나, 자치센터 운영 80개 교육강좌 관리 및 시설물에 대한 유지/보수를 당당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여주 신륵사와 목아박물관을 중심으로 하는 꽃청춘 가을 여행에 92살부터 80, 70세 동네 어르신 15분을 모시고 고추장 담그기, 청국장 만들기 체험도 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고, 집에만 계셔서들 그런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60대 후반인 저는 제일 막내로 앞장 서거나, 뒤서거니를 반복하며, 어르신들 모시며, 가끔은 누구누구 형님~ 하고 불러 드리면 너무나 해맑게 웃으시며 너무나 좋아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목아박물관을 방문하며 옛 오래된 기억이 스멀스멀 살아났음을 말씀드리면, 결혼 전 아내는 모태 신앙이었고, 저는 하느님도 계시고 부처도 계신다는 다신론자였는데, 여차여차 결혼을 했고, 결혼 후에도 저는 절에 다녔습니다. 절에 다니며 유명 스님들의 달마 대사 그림이나, 수묵화를 수북히 모아 왔었는데, 어느 날 찾아보니 하나도 없길레.. 아내에게 물었더니 목아박물관 기증서를 제게 내밀며 기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로부터 아내는 저가 개종하기를 간청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를 물불 안가리는 주바라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지난 기억을 지니며, 박물관을 훑어보다가 “사천왕은 본래 귀신들의 왕이었으며, 후에 부처의 제자가 되어 부처와 불법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라는 내용을 지나치다 사진을 찍어오며, 불교의 사천왕 신관(神觀)을 이해하고, 이를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영적 세계관과 비교 해석하는 시도는 재미있는 접근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조건적 막무가내적으로 아니다 하는 믿음보다는 그래도 경험을 해 보아 융통성을 지닌 상태에서의 접근도 좋은 케이스가 될 것 같아.. ChatGPT에 물어가며 그에 대해 정리해 봅니다. 불교의 사천왕은 본래 귀신의 왕으로서 악한 영역을 통제하던 자들이 부처의 제자가 되어 “악을 제어하는 선의 수호자”로 전환된 존재입니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바라보면, “타락한 권세가 회복되어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편입되는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의 중심이 하나님 자신이시며, 천사나 권세자들은 그분의 명령 아래 있는 종적 존재입니다. 결국, 불교의 사천왕 체계는 우주의 도덕적 질서와 법의 수호자 개념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격적 통치와 은혜의 질서로 대체됩니다.
사천왕과 수미산 ― 불교의 우주적 질서와 기독교 신학의 빛으로 본 영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수미산의 신화, 우주의 중심에서 불교의 세계관에서 수미산(須彌山, Sumeru)은 단순한 상상의 산이 아니며, 그것은 우주의 중심이자, 하늘과 인간, 신들의 세계가 만나는 영적 축으로 여깁니다. 수미산의 정상에는 제석천(인드라)이 자리하고, 그 아래 네 방향에는 사천왕이 우주의 균형을 지키며 서 있다고 전해지며, 고대 인도 전승에서는 수미산을 히말라야 북쪽 혹은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 근처의 상징적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리적 실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영적 세계의 중심축을 나타낸다는 점으로 수미산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만나는 경계의 산, 즉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차원의 중심이었다. 그 주변에는 네 방향의 신성한 산이 있고, 남쪽의 유리타(琉璃陀)는 투명하고 빛나는 생명의 산으로, 생명과 성장을 상징하는 증장천왕의 거처로 북쪽의 수정타(水晶陀)는 맑은 빛이 가득한 곳으로, 다문천왕이 부처의 설법을 들으며 비파를 연주하는 곳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명칭은 실제적 지리라기보다 도덕적·영적 질서의 상징으로, 우주와 인간의 내면 질서를 동시에 표현한 신화적 구조라 할 수 있다. 귀신의 왕에서 불법의 수호자로 ― 사천왕의 기원에서 사천왕은 본래 귀신들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변화하여, 이후에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 변모의 서사는 흑암에서 빛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존재의 전환을 상징한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며 도덕적 질서를 유지한다.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은 큰 입으로 외치며 악귀를 몰아내는 자로, 말과 진리의 힘을 상징한다.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유리타에 거하며 만물을 자라게 하여 생명의 에너지를 대표한다.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수정타에 머물며 모든 설법을 들으며 지혜를 쌓는 존재로, 들음의 상징이다. 불교에서는 이들이 욕계와 색계의 경계에서 우주의 도덕 질서를 지키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즉, 인간의 세계가 혼란하지 않도록 영적 균형을 유지하는 신적 감시자들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으로 본 사천왕 ― 유사한 구조, 다른 본질에서 기독교의 세계에도 하늘의 군대가 있으며, 천사들과 천사장, 그리고 하나님의 명을 수행하는 영적 존재들이 그 예다. 이들은 불교의 사천왕과 구조적으로 비슷한 위계를 보이지만, 그 본질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의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반면 불교의 사천왕은 부처의 법(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법 자체를 중심에 둔 수평적 질서를 따른다. 즉, 기독교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수직적 질서를 강조하지만, 불교는 법과 신들의 조화라는 수평적 질서를 중심으로 둔다. 이 차이는 구원의 방식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불교가 수행과 깨달음을 통한 자력 구원을 강조한다면, 기독교는 은혜와 믿음을 통한 타력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인간과 신, 혹은 절대자의 관계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의미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서의 신에서 은혜의 주 - 사천왕의 체계는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 구조이다. 그들은 귀신의 왕에서 출발해, 부처의 법을 지키는 존재로 변화했다는 이는 곧 영적 전환, 즉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환을 상징한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는 타락한 권세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회복되어 가는 모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권세와 질서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으로 불교의 사천왕은 법의 질서를 지키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그 질서를 새롭게 하신다. 사천왕이 우주의 균형을 유지한다면, 그리스도는 우주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신다. 요컨대 불교는 질서의 신화를 말하지만, 기독교는 인격의 하나님을 말한다. 질서는 세계를 유지시키지만, 사랑은 세계를 구원한다. 사천왕은 세상의 도덕적 균형을 지키지만, 그리스도는 인간과 우주의 본질적 회복을 이루신다.
결론적으로 사천왕의 상징과 기독교 신학의 대응적 차원에서 사천왕의 의미를 기독교적 상징으로 풀면 다음과 같다. 지국천왕은 공의의 수호자이며, 하나님의 정의와 대응한다. 광목천왕은 법의 음성으로, 말씀의 능력을 상징한다. 증장천왕은 생명의 확장자로서, 성령의 생명력과 통한다. 다문천왕은 들음의 지혜를 상징하며, 예배자의 신앙 태도와 맞닿는다. 그러나 불교의 상징이 질서와 균형의 철학이라면, 기독교의 신학은 관계와 사랑의 계시이다. 불교의 사천왕은 질서를 유지하는 신들이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질서를 넘어 새 창조의 주체가 되신다. 에서 ChatGPT는 “수미산의 사천왕이 세상의 질서를 지킨다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그 질서를 새롭게 하신다.”라고 하나, 저의 입장에서의 결론은 “베꼈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