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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경험함에는

by 잡학거사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다양성속에서의 통일성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만이 옳고 자신의 결정이 최선으로 모든 것은 윗선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는 리더를 가진 집단은 아마 불행 중의 불행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직의 발전은 조직의 리더의 그릇과 소양만큼 성장한다고 하는 고금동서를 막론한 경험론은 만고의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고집스럽고 자기주장이 강한 똑똑한(?) 리더들이 실패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일정 수준의 지적 능력은 당연히 갖추어야 하지만 이것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것 같으며, 때로는 득을 주기보다 해를 끼칠 때가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의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에 대하여는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알잖아!!, 그러니 내가 옳아!!”라는 착각 속에 함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며, 이런 부류의 리더들은 유연성이나 적응력을 잃게 마련일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진정으로 겸손하고 대의를 쫒는다고는 하나, 세상살이에서의 수많은 경험과 별별 종류의 인간들을 만나본 상태에서 살펴보면, 진짜 교만하고 겸손을 가장한 겸손으로 겸손은 너무나 부족하고 표현만 겸손일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모든 해답을 쥐고 있다는 착각과 오판 및 중요한 장애물에 대한 과소평가와 적응력 결여 등은 조직을 경직시키거나, 관리만을 위한 체제로 격하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더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조직의 진로 방향을 잘못 설정해 놓고 이를 고수하려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잘못을 깨달았을 때(깨닫기도 힘이 들겠지만..) 이를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상황에 바로 적응하고, 판단에 대한 오류를 수정하며, 변화할 수 있도록 지원과 도움을 주어야 하는 부분이 그 리더의 덕목과 그릇의 크기로 판별되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자신이 틀릴 가능성과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순응하고, 정정하여야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과 세상의 변화에 중심을 갖고 적응하는 순응력 및 항시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이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은 성공적인 리더들에게는 기본적으로 필요하며,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백번 강조해도 틀림과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수는 없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수 있는 전체를 볼 줄 알고 전체를 생각할 줄 아는 리더가 진정한 리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로 기억하는데, 저의 고향인 현재의 강원도 원주는 사통팔달의 도로망으로 서울과 매우 가까운 지척의 거리라고 느끼지만, 저의 어린 시절에는 한양 천리길로 방학 때나 같은 반 친구 중에 몇 명만이 서울의 친척집에 갔다 올 수 있는 호사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면 같은 반 친구들이 모여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서울에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는 저에게는 관심의 대상이고, 선망의 눈초리로 쳐다보곤 하였습니다. 한 친구 왈 “서울에 갔더니 온 거리가 다 유리로 깔렸어!!”라는 이야기에 저는 문화적 충격을 먹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를 온종일 생각을 하였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럴까?? 그렇다면 정말로 으리으리 하겠다?? 등등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던 것이 저의 어린 시절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가본 놈과 안 가본 놈의 차이와 가본 놈의 오류를 그대로 고스란히 착각 속으로 잡아끌고, 그 문제를 제대로 경험해보기전 까지는 오류를 정정하지 못한다는 예화로 들고 싶기 때문이며, 더불어 가본 놈이 우겨대기 시작하면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즈음은 차라리 순수함이 더 낮지 않나?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터울(터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아래 정말로 잘난 척만 하고, 본인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면서 관계를 어렵게 하거나 절단시키는 리더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온 터라.. 그렇게 까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영겁의 인생을 살 것이 아니면서 배우면 얼마나 배우고, 알면 얼마나 알겠냐? 마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삶에서의 진정한 죽음을 경험해 보아야 제대로된 인품과 역량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일본의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일본의 총리 2명을 배출한 자신이 만든 “마쓰시다 정경숙”의 강단에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죽음”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절대적으로 강단에 세우지 않겠다고 라고 하는 선언적 의지를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안다고 안 것이 아닌 내가 존재하며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진정으로 세상을 향한 절대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존재는 없어지고 남을 향한 진정한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콘크리트의 밀림의 정글과 같은 삶의 처절한 생존터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치인 병정개미 같은 조직원들에게 어떤 상황이 되드라도 그들을 끌어안고 함께 힘들어 해야 진정한 리더로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공허한 메아리를 읊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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