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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Nov 23. 2021

스스로 모호한 한계를 이르므로...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며 지극히 겸손해야 될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피조물”이라는 인식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 깊은 각성을 위해 교만함과 잘남, 존재적으로 스스로 살아있다는 인식조차도 내려놓기 위해 침잠해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절대자의 무한광대와 무소부재보다는 먼저 자신의 한계와 무지몽매하여 스스로 흐물흐물 허물어지며 영화의 CG효과와 같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짐을 경험해 내야하기 때문으로 잘 서있다고 바둥거리며, 스스로 모든 것을 잘할 수 있고 해줄 수 있다~ 잘난 척하며 목소리 내리깔아 보지만, 그 모두는 부질없는 것들로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할 것입니다. 초월된 관계와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초자연적인 환경 안에서는 스스로의 인식과 행동 그 자체가 맞다고 인식하며 삶을 살아낼 수는 있겠지만, 초월된 존재적 입장에서는 스스로 신경쓰며 인식한들 불완전한 존재로서는 제대로 된 것들의 결과를 얻을 수 없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초월된 세상과 보이지 않는 영역과 실상이 현실에 적용되고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초월된 그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질서를 따라야만 하다는 속성을 감각적으로 놓치지 말고 이해하여야함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고 모른다 해버린다면, 초월적 관계 속에서 완전하신 절대자의 가르침과 이끄심을 제대로 감동받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절적한 표현은 눈뜬장님이요 소경으로 스스로 남에게 민폐를 끼칠 수밖에는 없는 상황에 봉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의 불완전함에 따르는 오류와 안일함을 유지하므로 초월에 필요한 절대적 지표를 놓쳐 버려서는 아니 됨에 자신의 모든 영역을 절대자와의 초월된 관계로 만들어 버리는 자세를 견지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내며 선과 악이 공존함에 따라 중심 잡아냄은 진정으로 어렵겠지만, 자신이라는 현실적 존재를 부인(부정)하고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의탁하는 맡겨버림의 원칙을 고수하고 준수한다면 그리 어려운 과정만이 아닌 진리가 자유케 함을 얻어낼 수 있지 않겠나?를 생각해 봅니다. 세상이 급하며 이상야릇하게 돌아감을 지켜보며, 그 속에서 소외되거나 낙오되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기 위하여 스스로 감성 팔이나 유도함에 도매금으로 넘어감도 모르며 아니라~ 아니라 자신의 의식을 다듬고 토닥거린다고 될 성질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영으로 교통하며 소통하여야 하는 초월된 세상에서 자신의 영이 숨막혀함을 느껴내지 못함은 스스로 고립되어 한없는 영역에 스스로 함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내 절대자를 향하여 자신의 현재의 위치값과 고립 상황을 알려주시기를 간구하며 갈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혜시대라면 모르겠지만, 마지막이라는.. 믿지 않는 자들도 거침없이 외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스스로 보이지 않는 묶임과 엮임으로 천길 낭떨어지기 앞으로 스스럼없이 다가간다고 라고 하는 위기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다가 아니며, 봉사와 직분을 내려놓음과 더불어 지금까지 알고 있고 지속적으로 써 먹은 알량한 문자적 말씀이 아니라, 절대자께서 인정하는 증거 삼을 수 있는.. 심판에 증표가 될 수 있는 각고의 경외함을 이루는 진액을 짜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함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따라야함에도 형식에 국한된 자세로 일관되거나, 초월된 영의 세상이 요구하는 절대적 조건을 위반하는 자체로는 열매의 영역적 전환을 이룰 수 없음과 성화를 이룬다 애는 쓰지만 자격과 조건 미달, 더욱이는 함량 미달로 등급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사실에 진정 마음조리며 애태워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삼척동자 어린아이라도 아는 누구라도 눈만 감아도 알아낼 수 있는 내용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자신이 빳빳이 살아 있고, 스스로 삐다듬고 자신의 입장이 너무도 중요하여 남에게 잘 보이려 하므로 초월된 관계적 영역으로 이끌어내지 못하여 이루어지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을 바라보고 좀 더 나보다 말씀을 안다고 그를 따르며 남에게 의지한다고 그가 자신에게나 가족에게 구원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과 내가 얼마나 전도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라는 위안과 스스로 자위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제일 쉬운 지름길은 그냥 엎어져 불쌍한 이 인간을 용서하여주시고 은혜 주시어 나의 상황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라고 울며불며 바지가랭이 잡아 땡기듯 읖조리는 것이 시대적인 시간상에서 진정으로 바른 길이 될 것 같습니다. 절대자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생기를 부여하셨으나, 불순종하므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과정으로 이끄시지만, 본연적으로 인간 자체에 부여해주신 그 생기 속에는 초월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 모두가 부여된 “다! 주셨음”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들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육체 기반의 현실적인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신의 깊은 곳에 꽁꽁 숨어 내재된 본질적으로 초월된 영의 존재 기반을 각성해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들 각 생물의 이름을 부여할 정도로 능력자 이였다는 성경 말씀을 유추하면, 영역과 상상을 초월할 수 있는 권한 능력을 부여 받았음을 가름해보지만, 현실적 우리들의 실제는 그 모든 권한과 능력은 내재화되어 있음으로 때와 기한에 종속되는 스스로의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라고 하는 가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삼차원의 세계는 절대자께서 거하시는 영의 나라에 하나된 영원이라는 영역 안으로 왕의 대로로 다시 오실 주님의 사역이 마무리되어 주님 안에 통일되는 시점까지 한시적으로 제한된 공간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현재 초월된 영의 영역 안에 우리라는 불완전한 존재는 삶을 영위해 가지만, 초월된 초자연적인 영의 나라와 불완전한 한시적인 영역계의 차원에서 불완전은 완전과 온전을 제대로 보거나 인식할 수 없고, 오직 불가함에는 허락함에 따르는 은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아주 제한적인 상황적 입장만이 있을 뿐입니다.


더불어 그 자체를 찾아 그 모습을 발견한다 한들, 그 자체의 궤적과 위치값은 발견치 못하게 마지막 때까지 풀지 못하도록 봉인해 놓으셨기 때문이라도 우리 스스로는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모든 신경과 감각을 절대자를 향하도록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이는 죄성을 지닌 인간들의 경험이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그 바깥 또는 그 위에 위치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서의 신앙은 실체적 존재와의 초월적 관계를 통하여만, 이루질 수 있는 속성값을 지니므로, 그에 따르는 관계적 역할의 성립은 초월된 상태로만의 전환 과정이 필요로 하다는 말로 대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초월된 영의 세계를 영적인 동물로써 삶을 영위하며, 영적으로만 관계를 지닐 수 있는 가능한 영의 세계를 창조하신 절대자와의 초월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낮고 천함과 가지고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 초월적 생태계를 인식하느냐?와 더불어 스스로 겹겹이 쌓아올린 스스로의 한계와 벽을 허물어야만 한다는 기본적 전제가 형성되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한계를 굳건히 지으므로..” 이라는 본고의 결론은 회개를 이루어 죄사함을 받아 가벼움을 지니기 위해 기도를 놓치거나 거르지 말고, 무시로 주님과의 동행함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갈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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