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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Sep 21. 2019

아이가 끌어주는 어른의 길

취미는 걱정, 특기는 반성 

"내가 보고 싶을 때까지 보고 보고 싫어질 때 내가 끌 거야! 내가 끌 거라고!!"


 며칠 전 밤 9시 거실 풍경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 지르는 아이. 
시간을 4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이가 퇴근한 나를 반기며 귓속말을 한다.

"엄마~ 나 페파피그 보고 싶어. 패드 보여줘..."


WHY NOT?

회사에서 고객사 팀장님께 신나게 털리고, 나는 과연 뭐하는 인간인가 라는 자괴감으로 퇴근하던 길이었다. 신랑은 오랜만에 동료들과 술 한잔 한다니 아이가 잠들 때까지의 돌봄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놀자고 졸라대도 "패드 볼래?"라고 권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네가 그렇게 원하다는 그럼 나는 너의 바람을 들어주는 쿨한 엄마가 되겠어~call!!!!!.


"좋아~ 대신 곧 잠잘 시간이니까, 알람이 울릴 때까지만 보는 거야~"   


9시에 알람을 맞춰두고, 아이는 20분가량을 낄낄거리며 만화를 본다. 9시 알람이 울리고 아이에게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오늘따라 아쉬워하며 "나 더 보고 싶은데 10까지 보자 엄마~"라며 협상을 시도하는 아이. 그러나 이미 우린 9시까지라는 약속을 했고, 약속한 시간에 도달했다. 마지노선이다. 


그러면서 사실 마음 한 편으로는 좀 더 보여줘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나도 '무절제'로 치면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사람 아니던가. 과연 아이에게 그만 보라는 이 기준은 합당한 것인가? 내가 정하는 이 기준의 근거는 무엇인지? 라며 아이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있다. 늘 이런 식이라 결과적으로 나는 꽤 관대한 부모가 된다. 군것질이나 간식에도 후한 편이고, 영상 노출도 자유로운 편이다. 오히려 패드 가장 첫 번째 페이지에 아이가 보기 좋은 어플을 몇 개 깔아주고, 정해진 시간 내에선 아이에게 선택권을 준다. 물론 나의 이런 방임이 빛을 보는 건 내가 정하는 마지노선에 아이가  크게 떼 부리는 법는 아이라서다. 아마도 내가 허용해주는 범위가 아이가 스스로 생각했던 기대치보다 좀 더 넓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우린 쿨한 엄마. 그리고 떼쓰지 않는 딸로 암묵적 관계 형성을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오호라. 이런 생떼는 또 무엇인가. 내가 허용해준 넓은 마지노선까지 아이의 기대치가 다다른 것일까? 어쩐지 육아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것 같은 순간이다.


  관대함 속에서도 내가 지키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에게 구조화된 일상을 유지해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이를 키웠던 것은 (부모님이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아이가 매일매일 같은 곳에서 일어나고, 밥 먹고, 놀이를 하는 등 안정성을 유지하고자 함이 컸다. 아무래도 양가의 도움을 받다 보면, 아이가 친가에서 며칠, 외가에서 며칠 이렇게 돌아다니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터라 그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를 주지만 알림이 울리면 잠자리에 들겠다는 약속을 스스로 지키는 것. 알람은 요즘 나와 아이 사이에 새로 생긴 규칙이다. 저녁에 놀이터에서 놀 때도 몇 분 후에 알람이 울릴지 같이 결정하고 알람이 울리면 집에 들어가는 등의 약속 말이다. 

   

   몇 번을 스스로 끌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지만 아이는 끄지 않아 내가 강제로 껐다. 볼이 빨개지도록 울며 소리 지르는 아이의 말을 잘 들어보니 단순히 "페파 피그"를 더 보지 못하는 것만이 화난 이유가 아니었다. "왜 그만 봐야 해?? 내가 스스로 보고 싶은 만큼 보고 끌 거야! 내가 끌 거야! 왜 엄마가 꺼!" 

오호라. 자주성을 침해받았다는 것에 강하게 항의하고 있는 47개월이라니

흥분한 아이를 기다리고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당연히 차근차근했을 리 없다..)

결과적으로는 더 주장해봐야 엄마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 아이는 

눈물을 닦고 "나 이 닦고 동화책 많~~ 이 읽고 잘 거야!!!" 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마저 너무 귀여워서 원하는 만큼 동화책도 다 읽어주고 꼭 껴안고 재웠다. 


쑥쑥 크는 아이를 볼 때마다 더 이상 나에게 묻지 않는 아이를 상상한다. 

"엄마 나 껌 먹어도 돼?"  "엄마 사탕 먹고 싶은데..?" "엄마 나 지금 패드 봐도 돼?"

지금은 내가 '제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내 의견을 구하고, 부탁을 하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하며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중에 엄마의 기준에 동의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때, 나의 양육의 기준이 아이에게 귀찮은 꼰대의 간섭으로 받아들여질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부모의 올바른 모습일까?


   벌써부터 이런 걱정이 드는 건, 역시 내가 살아온 시간의 그림자다. 엄마의 양육기준에 얼마나 답답해하고 벗어나고 싶어 했었는지, 그럼에도 또 얼마나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해서 맘고생했는지가 아직도 너무 생생한 경험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너무 슬플 것 같다는 '사서 하는 걱정'함께  "엄마는 내가 이런 마음인 거 모르겠지?" 라며 혼자 잘난척 했던 때의 어리석음에 대한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밤이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이고 싶어서 자꾸 반성을 하게 된다. 

아이에게 좋은 어른이고 싶어서 반성이 자기 연민이 되지 않게 단도리하게 된다. 

아이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가 나를 키운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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