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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Oct 01. 2019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

그렇지만 단조에서 장조로 조 변환을 시도합니다.

47개월 아이의 그림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직선도 제대로 못 긋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매일 수십 장의 토끼를 그린다. 칠판에, 이면지에, 스케치북에도 그린다.


아이의 토끼는 풍선을 들고 있기도 하고  양치질을 하고 있을 때도 있다.  

풍을 떠나기도 하고  바지를 입기도 하고 치마를 입기도 한다. 

가끔은 토끼가 밥을 먹고 소화시킨 다음 똥을 싸야 하니 나에게 내장을 그려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당연히 똥도 함께.. 

그림에  색을 칠하고 싶어 하기는 하지만 꼼꼼하게 칠할 만큼의 인내심은 아직 없다. 본인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결과가 잘 안 나오니 색연필을 던지고 가버린다.


오늘은 색을 칠하는 아이 옆에서 같이 색연필을 들었다. 

"엄마도 색칠해보고 싶은데 같이 해도 돼?"라고 물었더니 오히려 신난 기색이다.  

"조금 지루하지만 꼼꼼히 칠했더니 더 예뻐지는 것 같아."라는 나의 말에 아이가 색연필을 더 꽉 쥔다. 

빈틈없이 칠해진 토끼 그림을 보면서 "엄마 정말 이쁘다~"라고 만족해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보니까 멋진 그림이 완성되었네~ 

엄마는 솔빈이랑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서 참 기분이 좋다.


잘하지 못하는 게 싫어 외면하던 색칠하기를 끝까지 함께 해주고 기다려주고 독려해주는 사람.  

완성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완성하면 더 기쁠 수도 있다는 것을 천천히 가르쳐주는 어른이 필요했다. 

네 남매 틈바구니에서, 생활에 지친 부모님 밑에서,

잘한 결과물 외엔 아무런 피드백을 받을 수 없었던 환경이었기에 늘 조급하고 불안했던 그 어린아이가 아직 내 안에 있다. 나는 그 아이가 안쓰럽지만 성가시다. 이미 어른이 된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너무 걸리적거린다. 부모가 젊었던 시절의 그 나이가 되어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 (머리로 하는 이해를 넘어서) 마음으로까지 모두 다 이해는 되지만, 이해가 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원망은 없지만, 내 안의 어린아이는 내 옆에서 나를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성가시게 하고 있으니까.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고마운 것은 그런 거다. 

약한 존재인 내 안의 그 어린아이가 그렇게 밉고 성가시고 한심했는데, 

내 아이를 키워보니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연약하고 돌봄이 필요한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다정하게 한마디 건네는 경험을 하며,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도 똑같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 본다. "너는 왜 그렇게 한심하니?"라고 다그치기 전에 "너도 많이 힘들었겠구나"라고. 

아이이게 한없는 사랑을 퍼부으며, 나를 긍정하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아이를 돌보며 내 안의 어린아이도 한번 더 돌봐주게 되었다. 

 

결국 아이와 함께 있을 때 아이를 더 세밀하게 관찰하는 부분은 내가 경험한 결핍이다. 

그래서 내 딸은 또 내가 알지 못하는 그래서 포착하지 못했던 어떤 순간에 (내게 혹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결핍을 느끼고 나 같은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 부모가 몰라서 놓쳤던 것처럼 나도 그런 부분이 당연히 있을 테니까. 끝나지 않은 돌림 노래 같은 부모-자식 관계.


  아이 덕분에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다. 

내가 아이를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은 아이의 모든 감정을 다 보살펴줘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잘 보듬어 줄 수 있는 여유일 것이다. 

아이가 내게 매일매일 선물을 주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아이에게 언제든 내어줄 수 있는 선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도 한 뼘 더 나를 긍정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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