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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Mar 19. 2020

노련하지 말고 서툴게...

'바라보는 나'가 '보이는 나'에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요새 안에 들어앉아 있는 나의 자아를 배신하는 실천이다.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하고, 지적이고,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는 정신적 매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압박. 사무실의 생수통을 갈지 못하는 대신 인사성 바르고 동료들의 생일이라도 잘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일이다. 완벽할 정도로 발달한 성찰적 자아를 통해 자기 신체를 스스로 파괴하는, 연못에 빠져 익사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스스로 배를 가르는 고도의 성찰 능력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타인 지향적 연극을 극복하는 힘. 때로 무기력하고 별 볼 일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 거기서 우리는 타인 지향성을 넘어선 진정성의 한 형태를 본다.  p.91  

                                                                                                         -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by 김원영

 


  이런 비상시국에 나는 운 좋게도(?) 3주째 재택근무 중이다.
나의 주 업무는 고객사 '기간 시스템의 관리'와 '특정 모듈에 대한 고객의 문의 응대' 다. 혼자서 뚝딱뚝딱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9 to 6" 에는 언제나 연락 가능한 상태여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아이의 유치원 개학은 4월로 미뤄졌다. 그나마 아이가 한 명이라 다행인가?  


   사람들은 각자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대부분의 역할을 '잘'하고 싶어 한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역할은 1. 좋은 엄마, 2. 능력 있는 직장인, 3. 자기 돌봄과 아이 돌봄 정도는 능숙하게 해내는 살림꾼, 4. 결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현명한 배우자, 5. 가까이 지내서 좋은 이웃, 친구, 6. 효녀 딸과 적당히 괜찮은 며느리, 7. 이 모든 역과 별개로 개인의 취향을 가지고 삶을 즐기는 매력적인 41세의 나 정도로 추려진다.  역할 앞에 붙은 형용사는 당연히 객관적인 지표로서 "좋은, 능력 있는, 괜찮은, 능숙한, 현명한, 효녀, 매력적인" 은 아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김원영 변호사가 말한 '바라보는 나'에게 인정받는 '보여지는 나'의 기준이다. 그리고 바라보는 나의 그 기준은 대부분 주위 사람들에게 평판으로 이루어진다.  막상 누군가 나에게 칭찬을 하면 "하하하 저 그렇게 좋은 엄마 아니에요~"라든지 혹은 "에이~ 내가 무슨 그렇게 능력이 있는 직장인이라고..." 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바라보는 나'는 한껏 고양되어 나의 '노련미'를 칭찬해주곤 한다.

   그리고 다행히 각각의 역할은 고유한 공간에서 행해진다. 집에서는 직장인이 아니고, 회사에서는 엄마가 아니다. 효녀는 친정에 갔을 때, 의지가 되는 친구는 만났을 때 집중하며 그 역할을 수행한다. 간혹 엄마와 살림꾼, 효녀와 배우자 사이에서 역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좀 더 노련해지기 위해 노력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공간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남편과 다투어도 회사는 가고, 엄마와 갈등이 있어도 우리 집에 돌아오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재택은 이 경계를 허물었다. 모든 역할이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일어난다.  

오전 8:00.

   아이가 깨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 일어나자마자 노트북부터 켠다. 예전이라면 스트레칭을 하거나 집안 정리 혹은 출근 준비를 했을 시간이다. 9시가 넘어 아이는 부스럭거리며 일어난다. 아침을 챙겨주고,  tv를 틀어준다. 다시 일을 하려고 앉지만  엄마와 놀고 싶은 아이는 계속 말을 건다. 직장인도 엄마도 아닌 순간들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카톡이 울린다. "언니 고생하지 말고 애 여기로 보내고 일해~" 거절하지 않고 윗집으로 혹은 아랫집으로 아이를 보낸다. 감사하게 도움을 받지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 한편을 차지한다.. 

낮 12:00.  

  환기를 시키고 로봇 청소기를 돌려두고  후다닥 점심을 먹는다.

설거지를 하며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한다. 어떤 반조리 식품을 해동시킬 것인가 하는 중요한 결정이다. 원래 주중에는 집에서 거의 밥을 먹지 않고, 주말에 2~3끼 정도 해 먹으니 부엌일이 많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 주중에 아이 먹을 국이나 몇 가지 밑반찬 해놓았고, 주말엔 주중에 아이가 먹고 남은 음식을 처리는 식이었다. 국은 육수를 내어 끓이고, 찌개용 돼지고기, 국거리 소고기 등을 냉동실에 항상 구비해두고 사용했다.  장조림, 멸치 볶음. 감자조림, 콩나물 무침 등 아이 먹을 반찬도 직접 만들었다. 구워 먹을 고기, 돈까지, 생선으로 번갈아 가며 식단을 짰다. 꽤 유능한 돌봄 주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삼시 세 끼는 달랐다.  3주 만에 마켓 컬리 회원 등급이 올라갔다. 객관적으로 가격은 저렴하지 않지만, 여러모로 가심비가 좋았다. 주말에 인스타그램에 올리던 #홍 요리 Tag를 포기했다. 반조리 식품 만세. 그러나 배송도 능력이다. 원하는 시점에 배송을 받으려면 주문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요즘에 쓱배송은 결제 후  2~3일 후에나 받을 수 있고 (이제 측이 아니고 쓰으으으으윽이 되었네), 아이 재우고 마켓 컬리 마감 시간(저녁 11시) 전에 사이트 들어가면, 다음날 배송이 이미 마감된 경우가 많다.


오후 15:00  

   엄마들 단톡 방에 아이 사진이 올라온다. 잘 지내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엄마와 같이 친구네 집에 있는데 우리 아이만 엄마 없이 있다. 한 번은 놀이터에서 노는데 발뒤꿈치가 까졌단다. 다른 엄마가 반창고를 붙여주었는데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고 한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뛰면 반창고가 떨어질까 봐 그랬다는데, 아픈 순간 엄마가 없는 게 서러웠던 건 아닐까. 속상한 마음을 참은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이번 주부터 유치원 긴급 돌봄을 보냈다. 100명 중 10% 정도 등원한다는데,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도, 어쩐지 내가 못나서 아이를 처음 가는 낯선 곳에 방치하는 기분이 든다. 저녁에 누워 인스타그램에 #아무 놀이 챌린지를 검색해보며 죄책감을 끝도 없이 증폭된다.

 

오후 18:00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일일보고를 보내고, 컴퓨터를 끈다. 하루 종일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 세탁기의 빨래를 건조기에 넣는 시간 빼고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불편한 마음이 든다. 사무실에서 퇴근 시간에 컴퓨터 끌 때는 그렇게 가볍게 재빠르게 컴퓨터를 끄고 나왔는데, 왜 집에서는 그게 불편할까? 사무실에 출근할 때는 그 공간에 매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무의 반은 한 느낌인데, 집에서는 잠시 한숨 돌리는 것도 어쩐지 해서는 안될 일 같은 느낌이 든다.


  퇴근시간 맞춰 돌아온 아이는 예전보다 애기 짓이 늘었다. 계속 안고 있으라고 한다.

자가 차량으로 출퇴근하는 덕에 일찍 집에 온 신랑이랑 셋이 저녁 챙겨 먹고 아이 씻기고 집안 정리하고

아이 재우면 저녁 10시다.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장을 보거나 심심해하는 아이를 위한 장난감을 검색한다. 사실 대부분 탈진한 사람처럼 아이 재울 때 더 깊이 더 빨리 잠이 든다.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모든 역할을 욱여넣어 수행하다 보니 도망칠 곳이 없다.

'바라보는 나'는 '보이는 나'를 끊임없이 꾸짖는다.  아이에게 반조리 식품 먹이면서! 집에 있는데 집안을 왜 이렇게 더러운데! 어이~ 당신 회사원 아니야~ 근데 노트북 안에 일이 쌓여있는 거 안 보여~ 역할 갈등 사이에 죄책감이 쌓으며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을 가장 먼저 버렸다. 책을 읽지 않고 일기를 쓰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죄책감이 덜 했으니까.

   그러다 집안의 모든 살림이라 할만한 육체노동을 마무리하고, 본인의 수면시간을 쪼개 게임을 하고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소거해버린 나'를 유유히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꼴 보기 싫었다. 나의 방전이 그의 탓인 것만 같았다. 그에게 역할들 사이의 감정노동에 지친 나를 좀 더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나를 위한 시간을 소거하지 않도록 네가 좀 더 했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예전과 달리 한참을 쏘아붙여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형용사를 떼면 안 되나?  아이를 남의 집에 좀 맡길 수도 있고, 집이 적당히 지저분할 수도 있다. 밑반찬 없이 국 하나로 밥을 먹을 수도 있고, 그마저 없으면 물 말아 김에 먹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아이가 옆에 있을 때 회사일이 좀 덜 효율적으로 할 수도 있고, 아이가 tv를 좀 더 볼 수도 있다. 늘 항상 정해진 법칙이 있는게 아니라 상황이 달라지면 수행하는 역할의 내용과 기준도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실 나는 이 재택 전에도 아이에게 짜증을 잘 내는 엄마였고, 아이와 직접 대면하는 시간은 하루에 5시간이 채 안되었다. 일요일에 몇 시간 조리할 때도 늘 투덜대고 힘들어했었고, 회사일도 뭉개고 미루는 일들이 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재택을 하며 오히려 모든 역할에 오히려 더 높은 기준을 부여하고 있었을까? 모든 역할들이 충돌하는 이 작은 공간에서 오히려 지켜야 할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


  나의 짜증은 결국 오랜 시간 동안 결핍을 감추기 위해 보이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구분하여 노련미를 뽐내던 나의 삶의 태도가 좁은 공간 안에 본질적 한계에 부딪혀 버린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서툴어도 괜찮다고. 상황에 맞추어 하면 된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주면 나는 정말 괜찮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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