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나의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면서 그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가끔, 가끔 이래 봐야 몇 년에 한 번. 어머니가 이모님 댁을 찾을 때 나를 데리고 길을 나서곤 했다. 그때마다 버스를 타는 일은 나에게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살던 시골은 읍내까지 걸어서 30여분을 다녀야 하는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버스도 자동차도 없던 시골 삶의 촌사람들에게 언제나 두 다리가 열일을 했다. 하지만 그건 나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고민해 본적 없이 터덜터덜 걸어서 등하교를 했었다.
버스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나의 고질병이었던 버스 멀미. 멀미 덕분에 1시간이 넘는 장거리를 가야 할 때는 멀미약을 복용해야 했다. 그러나, 멀미약은 그저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한 위안 일뿐, 버스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은 어김없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속에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물건이 있었으니 버스 기둥에 매달려 있는 검은색 봉투다. 나와 같은 사람이 적지는 않았기에 그때는 어떤 버스에도 검은 봉투 다발이 비치되어 있었다.
Image by 키씨 from Naver Blog시골 사람들이 멀미를 많이 하는 이유가 버스를 자주 타지 않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시절에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할 때도 있었는데 그 출렁 거림은 아마도 바다 위의 배의 출렁임 정도가 아니 였을까 기억나지 않지만 짐작을 해 본다.
요즘은 도로가 너무 좋아서 그런 출렁임을 느낄 수 없고 버스나 자동차가 너무도 쾌적해졌기에 버스에 검은 봉투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기에 사라졌지 않을까?
시골 촌놈이라 그래도 버스를 자주 탈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에 버스를 타는 것은 설레는 일이기도 했다. 버스를 탄다는 것은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준다는 이유가 있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를 지날 때마다 나는 내속에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일은 정말 싫었다.
미래에 혹시 타임머신이 진짜로 만들어져서 우리가 그것을 탔을 때도 이런 멀미를 느끼지 않을까?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속도, 안정감들이 무너지는 이동의 속도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현실에서 낯선 멀미를 맞이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긋지긋한 버스 멀미는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 봄방학을 마지막으로 내속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더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등하교를 위해 30분 이상 걷는 일은 여전히 해야 할 일이었고, 거기에 다시 버스로 40분 이상 가야 했기에 버스를 매일 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적응이 되었고 마법과 같이 사라 졌다.
하지만 마지막 멀미의 쓰린 기억은 기억하기 싫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공부를 지지리도 하지 않았던 나는 지금의 삶의 원천이 되어 준 공돌이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기술을 갈고닦기 위한 장비들이 필요했다. 그 장비들은 미래의 나의 생존을 위한 발판이 되어 줄 도구들이었다. 거창하게 장비라고 이야기했지만 인두, 리퍼, 롱로우즈 등등으로 그 도구들은 3년 내내 만능 기판 위에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활용이 되었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 후 취업을 했더니 이 모든 것들을 컴퓨터로 하고 있어서 당황했었지만...
그 보잘것없는 장비들을 시골에서 구매할 수도 있었지만 교통비를 포함해도 서울 세운상가 물건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었다. 당연히 물건도 다양하고 시골에서 볼 수 없는 것들도 볼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품질도 좋은 물건들이 훨씬 많았기에 서울로 향한다.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시골 촌놈들이 서울 나들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만들어 부모님들을 구워삶아 서울로 향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지 않지만 언제나 시골에서 어딘가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마지막 아픈 기억은 한창 들떠 있는 기분과 달리 그날도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아니나 다를까 그놈의 멀미는 아직 나를 떠지 않고 있었고, 나는 결국 버스에 내리자마자 확인을 하고야 말아야 했었다.
다 큰 놈이 길거리에서 얼마나 창피하던지… 아~ 기억하기 싫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 목적지인 세운상가로 향했다. 전철을 탔었는지? 버스를 탔었는지? 아마도 전철을 탔던 것 같다. 촌놈이 출세했지 버스만 타본 놈이 전철이라니... 다행인지 몰라도 전철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은 그래도 내 속을 확인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 아픈 기억의 시간을 마지막으로 나에게 그런 시련은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점점 더 세상에 물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은 내성이 강해져서 배를 타도 멀미를 하지 않는다.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는 지금,
아침에 버스에 올라 잠이 들어 정신없이 헤드 뱅이를 하다 깨어나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리고, 다시 환승을 하고 난 후 잠들면 안 되기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보면 어느새 멍 때리고 앉아 있을 때가 많다. 그렇게 멍 때리다가 어린 시절의 내가 버스를 타고 고생하는 모습들이 선명하게 떠 올랐다.
지금 나의 버스 생활은 어린 시절 그런 고생은 하지 않지만 너무 많이 늘어난 차량들로 가득 매운 도로 위, 버스는 달리는 시간보다 거북이걸음을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고, 그 안에 탑승한 승객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지며, 속이 울렁이고 답답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상황에 그저 바라는 것이라고는 시원하게 길이 뚫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다.
오늘도 내가 탄 광역버스에는 입석이 금지임에도 입석으로 위험천만한 귀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힘겹게 서 있다. 때론 입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도 가끔 멀미를 하는 때가 생겼다. 이건 옛날 그 시절의 멀미와는 또 다른 멀미의 한 종류인 것 같다. 그 증상은 가끔 찾아오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 버스 안은 만원이 되고 심지어 입석까지 가득 찼을 때 가슴이 답답해져 오고 속이 울렁거릴 때가 있다.
사실은 멀미라기보다는 일종의 폐소 공포증 같은 것이거나 공황장애에 가깝다고 나는 우기고 싶지만 사실 그 정도의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그런 날은 정말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롭기는 하다. 벌써 1년 그런 생황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가끔씩 그런 날은 찾아온다.
멀미를 하던 어린 시절의 고향에는 차가 있는 집이 없었다. 동네에 버스 노선도 없어서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갈 수 없었다. 언제나 튼튼한 두발 두 다리로 학교를 가고 5일 장이 서는 읍내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 다녔다.
그런 나에게 멀미는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어머니도 장거리 여행에는 멀미약을 드셨다. 그래도 나처럼 속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과거와 같은 멀미를 더 이상하지 않는 나에게 버스는 나에게 좋지 않은 추억을 안겨 주기도 했었지만 현재의 나에게 버스는 서울로 향하는 길에 출퇴근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고, 서울로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서 가는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 꼭 필요한 교통수단이 되어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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