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프레임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 자리에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

by 노연석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삶을 완성시켰다.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자연의 모든 것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것들 모두 시간의 흐름을 따라 스쳐 지나갔고 또 스쳐 지나갈 것이다.


생을 살다 보면 무수히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간다. 그중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짊어져야 할 과제이다. 인생의 한 구간에 돈이 없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있고 그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몸을, 영혼을 갈아 넣어 탈출을 위한 시도를 한다. 노력하는 만큼, 생각하는 만큼 빠르게 탈출이 되지 않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니 그런 시간이 있어 지금 조금 더 여유로워진 것 임을 알게 된다. 그 고통의 시간들은 모래 위에 그려지는 그림과 같아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나며 모두 지워 버린다. 우리가 쌓아가는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말끔하게 밀어내준 덕분에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지금 내가 그리는 그림도 파도가 말끔히 지워 줄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끝도 아니고 인생을 망친 것도 아니고 다시 그려낼 수 있는 기회를 받은 것일 뿐이다. 그리고 지워진 것은 모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거름이 되어 준다.


인생을 살면서 넘어서야 할 고비들은 모두 모래사장 위에 그려 넣는 그림과 같다. 지워지면 다시 그리고 다른 작품을 그린다. 그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그린다. 그러나 미완성도 완성도 모두 지워지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기억뿐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돈도 집도 자동차도 아니다. 살아온 날들의 기억 모래사장 위에 그렸던 삶의 그림들이다.


파도가 없었더라면 그림하나 그려놓고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림 위에 덕지덕지 무언가 덧대고 여백을 찾아 헤매는 삶을 살았을 거다. 파도는 지우개가 아니라 새로운 도화지를 제공해 준 것이고 더 나은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파도는 부모이고 선생님이고 친구이고 가족이고 선배이고 후배와 같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다. 나를 향해 밀려오고 밀려나가며 환기를 시켜 준다. 세상에 혼자였다면 아직도 도화지에 그림을 그릴 여백을 찾고만 있을지 모른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나간 자리에 오늘도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은 언젠가 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