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와 미움도 없는 이상한 나라
나는 가끔씩 대형 장난감 매장에 갔다. 살 것도 없는데 그랬다. 취미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꽤 꾸준했다. 낯선 환경(프랑스 파리 생활)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들렸던 곳이 장난감 가게였다. 그 버릇은 한국에서도 이어졌지만 자주 가지는 못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변화무쌍한 한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파리도 서울도 적응하느라 인생을 축내고 있었다. 이것은 핑계에 가까웠다. 장난감 가게는 현실이 힘들 때 간 곳이 아니던가. 아마도 달라진 환경 때문일 것이라. 그러니 두 번째 이유가 진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사실 갈만한 장난감 가게가 없었다. 장난감 가게 라야 거기서 거기였고, 그나마 있는 오프라인 장난감 가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축소되고 하나둘씩 사라졌다. 한국의 폭발적인 온라인 판매의 발전은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의미였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줄었다.
십여 년 전쯤 일이 문득 떠올랐다. 수많은 날 중 어느 날, 장난감 매장 어딘가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분명 달랐다. 이럴 땐 매장에 들어가 주는 게 예의다. 새롭게 단장한 그곳은 일명 키덜트 존 (kidult zone)이었다. 세월이란 놈 참! 대단하다. 눈 한번 질끈 감았다가 뜨면 10년은 기본이니 말이다. 세월은 내 뇌의 성장 속도보다 더 빠르게 노화의 시간으로 향했다. 세월은 내게 말했다.
‘너 그렇게 머리 안 쓰고 잔머리만 굴리더니 잔머리 정도 뇌만 남았구나!”
세월엔 장사 없단 말. 어쨌든 세월을 이길 순 없었다. 내 뇌는 세월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느 시간, 어느 구간에서 맴돌고 있다. 시간은 화살같이 흐르고 성장은 더뎠다. 딱 꼬집에 어디쯤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긴 어렵겠지만 어른의 구간은 아니었다. 세월아 네월아 가봐라 내가 철드나.
키덜트 (kidult: Kid:아이 + adult:어른), 이 가짜 어린이들은 진짜 아이들을 제치고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키덜트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릴 적 분위기와 감성을 간직한 성인들 [시사상식사전]로 어린 시절의 경험했던 갖가지 향수들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그 경험들을 다시 소비하는 사람이라고 [위키백과] 매우 낭만적으로 풀이하고 있었고, 또 키덜트를 대중문화의 한 형태로 독자적인 콘셉트로 해석하며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멋들어지게 해석되었다.
내게 키덜트는 그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 장난감 따위에 열광하며, 그것을 본떠 만든(이들은 본떴다는 말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본뜨다니! 진짜라고! 오리지널 몰라?) 캐릭터를 광적으로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덕후에 지나지 않았다. 내 생각은 네이버 [국어사전]에 기록된 내용과 거의 흡사했다. 여기서 특히 나는 광적인 부분, 광적으로 장난감을 모으는 어른으로 해석했다. 그러니 장난감 나부랭이에 추억이 조금 있는 나는 키덜트는 절대 아니었다.
그들, 그러니깐 키덜트의 습성은 내 관점에선 이상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사는 거라 하기엔 가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보단 이미 갖고 있는 캐릭터를 크기별 재료별로 사고 또 사 모았고, 서로 공유하고 자랑했다. 그들 사이엔 부러움은 있을망정 질투나 미움은 없었다.(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집단에 가까웠다. 천국은 아니겠지?)
그러다 자식 같은 아이라는 장난감을 비싼 값에 팔아 치우고 또 다른 아이를 데려다 놓고 감탄했다. 그들의 그런 취미가 어린 시절 추억과 향수의 표출이라고 하긴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내게 키덜트는 그저 추억이라는 포장지로 욕망을 그럴싸하게 싼 집단일 뿐이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가 2990.000원짜리가 세일해서 1465,100원이라고 쓰여있었다.(요즘 시세) 그 방패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진짜 지구라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는 내게 삼겹살 굽는 솥뚜껑보다 쓸모없었다. 그들, 그러니깐 키덜트를 향한 이런저런 부정적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지만 내 발은 키덜트 존을 향했다. ‘뭐 구경하는 건데 구경하는 건 나쁘지 않잖아!’ 이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키덜트 존은 벽이나 울타리로 다른 구역과 구분 지어 놓진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놀다가 자칫 장난감을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부모님 밑천 거덜 낼 수 있는 곳이 그곳이었다. 나의 짐승적인 본능은 그것을 금세 알아챘다. (뭐 그놈의 본능 누구나 있는 거지만)
‘눈으로만 보시오’ 란 글도 여기저기 보였다. 주인공들을 비추는 조명도 달랐다. 파리한 형광등이 아닌 화려한 조명이 그들을 아낌없이 사방팔방 비췄다. 마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반짝이는 선반에서 ‘나 비싸요’ 외쳤고, 열쇠까지 걸고 진열되어 있는 것도 수두룩했다. ’ 가격 문의 요함’이란 문구는 가격에 상상력까지 더해줬다. ‘모셔놨네 모셔놨어!’ 나는 비아냥거리면서도 키덜트 존을 떠나지 않았다. 욕하면서 부러워하는 심리? 노노노 절대 아니다. 내게 돈이 넘쳐난다 해도 나는 비싼 장난감을 사모으지는 않을 것이다. 나 어른이다. 게다가 꽤나 현실적인. 혹여나 장난감 가게라면 모를까.( 이 뭔 소리 린지.)
아! 참 나랑 같이 온 혹( 나의 반려자) 얘기를 안 했다. 혹, 혹부리 영감의 그 혹, 혹 떼려다 혹 붙인 그 의미다. 혹은 이미 키덜트 존 유리 장식대에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모르지 저러다 보면 언젠가 하나가 되려는지’
어른스러운 나는( 혹보단 그럴 거라고 믿는다.) 혹과는 다른 자세로 한두어 발자국 뒤에서 관망했다. 이제부터 나와 혹은 모르는 사이다. 혹과 나는 서로 아는 듯 모르는 듯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구경하고 있을 때 젊은 커플이 그 앞에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남자: 이거 뭐지?(눈이 빛난다.)
나: ( 이게 뭔지 모른다니 참 착한 남자 어른이구나.)
여자: (사뭇 진지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이거? 이거…(말도 좀 더듬으며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듯 남자에게 바싹 붙는다.) 그거 있잖아! 아씨~ 뭐라 하던데… 어른이지만 애 같은, 애랑 어른 합친 말인데….
키즈… 키 키.. 어덜.. 음… 키덜트! 그래!
나:(뭐야! 귓속말 아니었어? 남자 귀에 손나팔 모양까지 만들어 가까이 대고 말했잖아! 근데 왜 말이 다 들리는 거야! 그것도 크게! 그리고 여기저기 키덜트라고 쓰여있구먼… 새삼스럽게 키키 키덜트? 키덜트가 새로 발견한 대륙이라도 되나!)
남자:뭐라고?
여자:(주위를 경계하듯 살피면서 목소리를 낮춘다) 키덜트라고 있어. 애랑 어른이랑 합친 말인데 어른이면서 정신연령이 낮아 애처럼 장난감을 좋아하는 인간을 키덜트라고 해. 자기 키덜트를 몰랐단 말이야!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장난감 가게를 울렸다.
남자:( 살짝 당황한 듯) 나도 장난감 좋아하는데…
여자: 으아~ 그 정도가 아니야. 정신연령이 낮다고.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는데 장난감에 미쳐서 돈 막 쓰고 부인한테 혼나는 그런 게 키덜트지 자긴 아니지~
남자:(동공이 흔들린다.)
지금 나는 이제 막 싹을 틔운 키덜트의 싹이 잘라나가는 현장을 목격했다. 키덜트 존 주변을 서성이는 몇몇 그림자가 얼름처럼 멈춰 있었다. 지금 키덜트 존은 온통 그녀만의 세상이다.
정신연령까지 운운하는 말도 안 되는 그녀의 정의에 맞서고 싶었지만 들끓는 마음을 눌렀다. ‘뭐야! 나 지금 키덜트 편드는 거야? 나는 키덜트는 절대 아니라고. 그냥 마구 내뱉은 저 논리가 걸리는 것뿐이라고. 진짜라고’
'혹'도 젊은 남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장식대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뒤돌아 나를 찾았다. 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나는 몇 발짝 더 멀리 떨어져 눈을 피했다.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이지 않은가! 지금은.
잠시 후 젊은 남녀가 지나가자 혹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나에게 다가왔다.
혹: ( 웃음을 참으며 ) 뭐라고 한 거야?
나: 못 들었어?
혹: 키덜트는 뭐 애랑 어른이랑 뭐라 했잖아.
나: 너 같은 애가 키덜트라는 얘기잖아.
정신연령 낮고 애처럼 장난감에 환장하는 인간, 바로 너 같은 인간 말이야!
혹: 나는 장난감 수집도 안 하는데.
나: 수집을 안 했다고?
혹: 에이~ 그 정도는 수집도 아니지. 겨우 몇 걘데…
나: 못 들었어? 정. 신. 연. 령. 낮. 은. 애처럼 장난감 좋아하는.
혹: 그럼 너도 키덜트네!
나: 뭐? (나는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다.) 에이 나는 아니지.( 이걸 한대 칠까.)
자연스럽게 웃는다. 혹도 따라 웃는다. 만약 여기서 화를 낸다면 그건 스스로 키덜트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혹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키덜트는 아니다. 나는 웃어본다. 혹보다 더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