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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나물 Oct 18. 2019

당신에게 선물하고픈 와인

내 맘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우리 인생에 뜻밖의 행운이 가득하길

로버트 바일 (Robert weil) 와이너리의 VDP 로고

 나는 지인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살짝 달면서 향긋한 화이트 와인을 주로 선물하곤 한다. 특히 독일산 리슬링 와인을 선물할 때가 많은데 독일 와인은 라벨이 복잡해서 더욱 신경 써서 구매해야 한다.

 내가 독일 와인을 고를 때 가장 신뢰하는 것은 바로 독수리 마크이다. VDP (Verband Deutscher Prädikats) 협회에서 수여하는 포도가 그려진 독수리 마크는 독일에서 최고의 와이너리임을 인정받은 증표이다. 매해 회원 와이너리 수가 조금씩 바뀔 만큼 까다롭게 관리되고 있어서 매우 신뢰가 간다.

  또 하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곳에서 생산되었느냐인데, 특히 선물로는 라인가우(Reingau) 지방에서 생산된 와인들을 고집한다. 라인가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뤼데스하임 사이의 라인강 유역으로 아주 작은 지역이나, VDP 회원 와이너리 196개 중 26개가 위치할 만큼 독일에서 인정받는 와인 생산지이다.

요하네스베르크 고성 (Schloss Johannisberg)

 라인가우의 VDP 와이너리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요하네스베르크 고성이다. '베르크'는 독일어로 산 혹은 언덕이란 단어로 '요하네스베르크'라고 하면 '요한의 언덕'이란 뜻이 된다. 말 그대로 이 언덕은 성 요한에게 봉헌된 언덕이란 뜻이다. 약 900년 전부터 노동을 중요시 여겼던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이 곳에 모여 새벽부터 일어나 포도를 가꾸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곧 수확철을 앞둔 요하네스부르크의 포도

 세월이 흘러 풀다의 왕이자 수도원장인 하인리히 폰 비브라가 이 포도밭을 소유하게 되면서, 이 포도밭은 풀다의 수도원장 소속이 되었다. 포도는 그 당시 매우 중요한 물자여서 매해 수확철이 되면 포도를 수확하라는 전갈을 받고 나서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1775년에는 포도밭 주인인 풀다의 수도원장이 회의에서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수확하라는 명령이 늦어지고 말았다. 수확철을 훨씬 지난 포도는 이미 쭈글쭈글 말라버렸지만, 농부들은 포도밭 주인의 명에 따라 포도를 수확해서 와인을 담갔다. 신기하게도 망할 줄 알았던 그 해 포도주는 오히려 더 향기롭고 달콤했다. 포도가 익으며 수분이 날아가 당도가 높아지다 보니 훨씬 더 단 와인이 되었고, 이것이 바로 슈페트레제의 탄생이다. 현재 독일은 프리미엄 와인 품계를 수확시기로 결정하고 있을 만큼 슈페트레제가 탄생한 이 곳이 독일 와인에서 가지는 위상은 매우 특별하다.

요하네스베르크 식당의 테라스 풍경

 오늘은 남편의 생일을 맞아 의미 있는 와이너리에서 아주 특별한 점심을 먹으러 아침부터 급히 나섰다. 모젤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벗어나 라인강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열심히 남편에게 요하네스부르크 와이너리의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떠들어댔지만, 남편은 이미 아름다운 포도밭에 마음이 빼앗겨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았다. 의미야 어떻게 되었든 수확을 앞둔 싱그러운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옛 고성에서 아름다운 라인강을 바라보며 마시는 와인은 완벽한 생일 선물이었다. 이 날 우리의 시간은 이곳의 슈페트레제처럼 아주 특별하고 아주 달콤했다.


에버바흐 수도원 전경과 수도원 건물 (Eberbach Kloster)

  점심식사 후, 우리는 에버바흐 수도원에 들렀다. 이곳은 근면하기로 유명했던 시토회 수도사들이 900년 전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열심히 와인을 만들었던 유서 있는 수도원이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수도원으로 쓰이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종교 본연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루터의 사상을 따라 대부분의 교회, 수도원 및 종교 시설들이 입장료를 받지 않는데, 이 곳은 수도원이 아니기에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수도원 지하의 와인 저장고도 구경할까 고민했지만 다른 와이너리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와인샵만 들렀다.

뤼데스하임 (Rudesheim) 골목

 이 지역에는 로버트 바일 (Robert weil)과  볼라즈 고성 (Schloss Vollrads)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VDP 와이너리들부터 프린쯔 (Weingut Prinz), 제이콥 정 (Weingut Jakob Jung), 바쓰 (Wein- und Sektgut BARTH GbR) 등 낯선 VDP 와이너리들까지 약 십여 곳의 와이너리들이 반경 10km 안에 위치하고 있다. 몇 군데 더 들러 한두 모금씩만 마셨는데도 슬슬 혀가 얼얼해오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이렇게 라인가우 와이너리 투어를 마무리하고, 생일 케이크를 사러 근처에 있는 뤼데스하임에 들렀다. 이곳은 중상류 라인 계곡으로 향하는 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이라 항상 왁자지껄하다. 유람선 선착장 앞에는 유리컵에 무심하게 담긴 1유로짜리 와인들을 들고 유람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적이는 인파를 끼고 오른쪽으로 나있는 작은 길로 몸을 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포도 넝쿨이 벽을 가득 채우고, 그 사이로 아기자기한 예쁜 간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아름다운 골목길이 시작된다. 차도 지나갈 수 없는 좁은 골목 양편으로 와인숍과 레스토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네온사인까지도 아름답게 녹아들어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사려고 구석구석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적당한 케이크를 찾지 못했다. 대신 추워져서 나오지 않을 줄 알았던 납작 복숭아를 살 수 있었다.

 납작 복숭아만 몇 개 사들고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왔다. 운전하느라 하루 종일 와인 냄새만 맡던 남편도 드디어 함께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낮에 사두었던 에버바흐 수도원의 아우스레제를 꺼냈다. 아우스레제는 슈페트레제보다 더 늦은 시기에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더 달고 더 깊은 벌꿀향이 난다. 병을 열자마자 아카시아 꿀 향기가 은은하게 방으로 퍼져나갔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달달한 와인과 납작 복숭아를 먹으니 정말 행복했다.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뜻대로 되는 거 하나 없는 인생이지만 가끔은 원치 않았던 일들이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줄 때가 있다. 마치 이 납작 복숭아처럼. 마치 독일의 슈페트레제처럼.

  만약 당신에게 와인을 선물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우아하고 달콤한 '독일 리슬링 슈페트레제'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기쁜 일을 위해 함께 축배를 들고 싶다. 이런 건배사와 함께 말이다.


내 맘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우리 인생에 뜻밖의 행운이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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