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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나물 Oct 27. 2019

모두를 위로하는 와인

뷔르츠부르크에서 친절한 독일 와인 한 잔

뷔르츠부르크를 흐르는 마인강

 대부분의 종교는 술을 금하는데 반해, 유럽의 천주교는 술 특히 와인에 관대하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유럽의 물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유럽의 물은 석회가 많이 섞여있어, 장기간 복용할 경우 다양한 병에 걸릴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면한 수도사들이 가장 많이 했던 일이 '양조'였다. 일조량이 좋은 남쪽은 일 년 내내 포도를 가꾸고 와인을 담가 식수를 확보했고, 추운 북쪽은 좋은 물을 찾아 맥주를 담가 식수를 확보했다. 중세의 수도원은 지식의 보고로 의술을 포함한 다양한 지식을 연구하는 곳이었고, 사람들은 아프면 수도원을 찾아가 치료받곤 했다. 수도사들은 그들에게 질 나쁜 물 대신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게 했고, 환자들은 그곳에서 취한 채 푹 자고 나면 금세 나아지곤 했다. 수도원들이 이름난 양조장들로 알려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병원이나 양로원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지하에 큰 저장고를 세우고 환자들을 위해 와인과 맥주를 가득 저장했다. 그래서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와이너리 역시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요양소이다.

복스보이텔 (Bocksbeutel) 병에 담긴 프랑켄 와인

 뷔르츠부르크는 프랑켄 (Franken) 지역 와인이 모여드는 와인 중심지이다. 프랑켄 지방이 지금은 바이에른 주(州)에 속해있지만, 나폴레옹이 독일을 점령한 뒤 자기 마음대로 프랑켄 지방을 바이에른에 포함시켜버린 거라 본래 바이에른과는 확연히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바이에른이 '맥주 순수령'을 주축으로 한 맥주 공화국이라면, 프랑켄은 지역색 있는 포도 품종으로 승부하는 와인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프랑켄 와인은 주로 복스 보이텔 (Bocksbeutel)이라는 특이한 모양의 병에 담겨 판매된다. 옛날에는 마땅한 병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사냥꾼들이 양이나 염소 고환에 와인을 담아 사냥을 떠나곤 했단다. 그래서 프랑켄 와인은 지금도 그 모양을 본뜬 특이한 병에 담아 판매되는데, 72 웩슬레 이상의 당도를 가진 포도로 프랑켄 지방에서 만들어진 와인들만이 이 병에 담기는 영광을 누린다.

옛(Alte) 마인 다리를 건너면 뷔르츠부르크 구시가지로 들어선다.

 마인강을 따라서 여행을 다니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뷔르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 세 곳을 들렀다 저녁에는 프랑켄 음식들과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곁들여 신나게 마셔볼 요량이다. 마인강 서쪽에 있는 숙소에 차를 대어놓고, 이 곳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뷔르거슈피탈 와이너리 식당 (Bürgerspital-Weinstuben)

 뷔르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은 1316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요양 병원으로 출발했으나 현재는 독일에서 손꼽히는 와이너리가 되었다. 120 헥타르나 되는 넓은 포도밭에서 포도들을 손으로 수확한 뒤, 이 곳 지하에 있는 독일에서 가장 큰 오크통에 넣고 숙성시킨다. 여러 포도들을 기르지만 질바너(Silvaner)가 유명한데, 2016년에는 독일 최고의 질바너 와이너리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요양소가 어찌나 큰지 블록 전체가 뷔르거슈피탈 요양소여서 블록 전체를 한 바퀴 둘러서야 와이너리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중앙 정원에서 독일 최고 질바너와 세계 최고 소시지를 함께 먹었다. 질바너는 미네랄의 느낌이 리슬링보다 강해서 입안에서 좀 더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있다. 좀 더 통통 튀는 매력이 있달까. 독일 여행 이후로는 리슬링보다 질바너를 훨씬 더 자주 구매하게 되었다. 질바너는 와인 자체가 주는 느낌도 훌륭하지만, 마실 때마다 나를 다시 한번 뷔르츠부르크로 데려다준다.

율리우스슈피탈 가게 (Juliusspital Weineck)

 다음은 율리우스슈피탈에 들렀다. 이 곳 역시 요양병원이었던 곳으로 여기 지하 와인 창고가 어찌나 컸던지 현재도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와이너리가 이곳이다. 이 곳은 총 180 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고,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기르고 있다.

43 % 질바너 (Silvaner)

17 % 뮬러트러가우 (Müller-Thurgau )

20 % 리슬링 (Riesling)

6 % 슈페트부르군더 (Spätburgunder, 혹은 pinot noir)

4 % 화이트 부르건디 (White burgundy)

10% 그 외 쇼이레베 (Scheurebe), 트라미너 (Traminer), 피노 그리스 (Pinot Gris) 등  

 집으로 가지고 갈 질바너 와인을 사려는데, 3가지 지역에서 나온 것들이 있어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내 뒷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점원이 나를 부르더니 "마셔보고 골라도 좋아. 너 질바너 사고 싶은 거지?" 라며 웃으며 아래 서랍을 드르륵 여신다. 와인이 빼곡히 들어있는 서랍에서 와인 몇 개를 주섬주섬 꺼내서 차례로 따라주며 마셔보고 마음에 드는걸 말해달라고 하셨다. 평범한 서랍인 줄 알았던 계산대 아래의 서랍은 와인 냉장고여서 와인은 마시기 좋게 적당히 차가웠다. 한 병만 살 꺼라 죄송한 마음에 한 잔씩 받아 들고 쭈뼛거리니 새로운 잔에 리슬링도 하나 슬쩍 따라주시며, "괜찮아. 편하게 생각해."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셨다. 한참을 고민하다 모과향을 은근히 풍기는 아침 햇살 같은 이프호퍼 크론스베르크 (Iphöfer Kronsberg)의 질바너를 골랐다. 독일와인은 하나같이 요양 병원의 요양사들처럼 점원도, 가격도, 와인도 모두 참 친절하다.

슈타트리허 호프켈러 (Staatlicher Hofkeller)

 다음은 1128년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와이너리에 들렀다. 호프켈러(Hofkeller) 혹은 슈타트리허 호프켈러 (Staatlicher Hofkeller)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곳은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궁전)의 지하 와인 창고에서 유례 된 와이너리이다. 고풍스러운 입구와는 전혀 다르게 실내는 매우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곳은 품종별로 VDP 세부 등급까지 함께 분류해두어서 가격대별로 원하는 와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트라밀러를 살까 질바너를 살까 고민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사기 힘들 것 같은 트라밀러를 구입했다. 점원은 방긋 웃으며 계산대 아래의 서랍을 드르륵 열더니 이게 네가 산 와인이라며 마셔보라 권했다.

 트라미너의 원래 이름은 게부르츠트라미너(Gewürtztraminer)로 이 곳에서는 트라미너라고 부른다. 독일의 트라미너는 알자스의 게부르츠트라미너와는 매우 달라서, 이곳의 포도는 다른 트라미너일 거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 품종은 모젤의 옆 동네인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에서 주로 생산하는 와인으로, 사바냉 블랑(Savagnin Blanc) 포도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태어난 품종이다. '게부르츠'라는 말은 '향신료' 혹은 '향이 풍부한'이라는 의미인데 한마디로 향이 일품인 포도이다.

 이것만 마셔보았을 때는 잘 모르겠어서, 점원에게 리슬링도 마셔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독일 트라미너는 알자스의 게부르츠트라미너와 비교해서 향이 약한 편이라지만, 리슬링과 비교해서 마셔보았을 때에는 좀 더 기분 좋은 열대 과일향이 확연히 느껴졌다. 마음에 쏙 들어서 내년 여름 더운 날 꺼내 마시려 깊숙이 넣어두었다. 아마 나는 이 와인과 함께 그녀의 상냥한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친절했던 뷔르츠부르크를 떠올릴 것이다.

Fränkisches hochzeitsessen와 아쉬운 마지막 와인

 몇 잔 홀짝인 게 다인데 벌써 저녁시간이다. 아침에 건넜던 예쁜 다리 옆에 있는 식당에서 꼭 먹어보고 싶었던 'Fränkisches hochzeitsessen'를 시켰다. 프랑켄 지방 사람들이 결혼할 때 먹는 음식이라 해서 매우 기대하며 기다렸다. 음식의 정체는 소스를 뿌린 넙적한 국수와 삶은 닭고기 몇 점에 크랜베리 소스를 더한 요리였다. 국수가 꽤 두꺼워 맛이 좀 심심하다 싶었는데, 크렌베리 소스와 같이 먹으니 꽤 맛있었다. 여기에 바쿠스 (Bacchus)라는 품종의 와인을 곁들였다. 바쿠스는 프랑켄 포도밭의 약 10% 정도의 면적에서 생산되는 품종인데, 빨리 익어버리는 품종이라 평균 온도가 낮은 편인 이 곳에서 경쟁력있는 품종 중 하나이다. 한 잔만 마셔보고 평가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첫 한 모금은 상당히 달았다. 술의 신의 이름을 따다가 품종을 만들었기에 매우 기대했었는데, 이들에게 신의 술이란 힘겨운 하루를 달래주는 달콤한 한 잔의 '약'이었던가보다.    

 이대로 떠나기엔 너무 아쉬워 자리를 옮겨 한 잔 더 마시기로 했다. 그곳에서 뮬러트러가우 다음으로 많이 기르는 레드와인 품종인 도미나 (Domina)를 마셨다. 독일 레드와인에서 나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그다지 달갑진 않았지만, 굉장히 남성적인 와인이라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산미도 탄닌도 꽤 강해서 게르만 민족들 같은 와인이었다.

아침에 건넜던 마인 다리가 어느새 와인을 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와인이 언젠가부터 멋지게 차려입고 어려운 용어들을 쓰며 마시는 어려운 술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 와인은 다리 위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가볍게 걸치는 일상의 작은 기쁨일 뿐이었다. 아침에 건너왔던 다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와인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독일에서 완전 독일 와인에 빠져버렸다. 삼일동안 들렀던 와이너리들은 나에게 항상 친절했다. 그들의 상냥함과 따뜻함이 나를 완전히 팬으로 만들어버렸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와이너리들이 좋았고, 친절한 그들에게 반했다. 빵 한 조각, 소시지 하나와 함께 마시는 가벼움이 편안했고, 합리적인 가격덕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독일 와인은 친근하다. 마치 힘들었던 오늘 하루를 위해 요양소에서 내어주는 물 한 잔 같이.


 


 VDP 안에서도 포도밭의 등급에 따라 4단계로 구분된다. 독일 와인을 살 일이 있으면 참고!

VDP. Grosse lage (그로세 라게) : 프리미엄급 와인으로 프랑스의 그랑크뤼(Grand Cru)와 비슷하게 쓰인다.

VDP. Erste lage (에어스테 라게)  : 1등급 와인

VDP. Ortswein (오르츠바인) : 해당 마을의 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프랑스의 빌리지 와인과 비슷하게 쓰인다.

VDP. Gutswein (구츠바인) : 지역 와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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