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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나물 Nov 07. 2019

독일 맥주 이야기 (1)

가장 순수한 맥주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호프집, 호프브로이

 독일은 유럽 북쪽에 위치한 탓에 포도를 재배하기가 다소 까다로웠다. 유럽의 강은 대부분 석회질을 포함하고 있기에 안전한 식수 확보를 위해서 독일인들은 포도 대신 보리로 술을 담갔다. 독일이 맥주로 유명하긴 하지만, 맥주는 수메르 문명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 문명에는 맥주 여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었고, 함무라비 법전에도 맥주를 팔 때 양을 속이면 익사시킨다는 법률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고 독일 맥주의 역사가 짧은 것은 결코 아니다.

 기원전 10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북쪽으로 진격하며 가장 중요하게 챙겨갔던 보급품은 와인이었다. 군사들에게 물은 필수이므로, 와인이 가장 중요한 보급품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그에게 신기하게 보였던 것은 적군이 마시는 맥주였다. 갈리아(현재 프랑스) 지역을 정복하며 남긴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켈트인들은 와인이 아닌 오줌 색깔의 밍밍한 술을 마신다며 그들을 비하했다. 로마군이 와인을 전파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맥주 혹은 맥주에 가까운 원시적인 방식의 술을 담가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갈리아의 북쪽에 위치한 게르만 족(族) 즉 독일 조상님들도 마찬가지로 이 오줌 빛 밍밍한 액체로 식수를 해결하고 있었다. 와인 만드는 방법이 전파된 뒤, 기후가 온화했던 프랑스는 다량의 와인을 양조할 수 있었지만 기후가 그렇지 못한 독일은 여전히 맥주에 식수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인이 우수한 맥주 생산국이 된 것은 기후의 제약 때문만은 아니었다. 1516년 바이에른 공국에서 발표된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이 사실 더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맥주순수령이란 맥아(보리), 물, 홉을 가지고만 맥주를 만들 수 있다는 간단한 식품법이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밀 값이 올라 제빵사들이 재료를 공급받는데 어려움이 있자 양조장에서는 밀가루를 쓸 수 없게 하려고 제정되었지만, 부수적으로는 양조장들이 독초나 마약 등을 넣어 맥주를 양조하지 못하도록 제정된 법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맥주순수령은 독일 양조장들이 같은 재료를 가지고 각기 다른 맛을 낼 수 있도록 양조 기술을 진화시키는데 기여했고, 지금도 다양한 노하우로 경쟁력 있는 맥주들을 생산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커 프쇼르의 라들러(Radler)

 내 생각에는 독일 맥주가 최고가 된 데에는 독일인들의 유별난 맥주 사랑이 한몫했을 것 같다. 식당에 앉으면 꼭 뭐 마실 건지부터 물어보는데, 그냥 맥주(Beer)하고만 물어보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메뉴판 가장 상단에는 맥주들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무알콜(Alkoholfrei) 맥주'들이 자리하고 있다. 효모를 섞지 않은 맥주 원액에 탄산을 가한 음료들로 대부분 달콤하다. 또 다른 종류로는 라들러가 있는데, 자전거를 탈 때 마셔도 되는 맥주라는 별명이 있는 음료로 맥주에 소프트드링크를 섞어서 만든다.  2% 내외의 낮은 알코올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운전할 땐 마실 수 없다. 사실 맥주를 사서 직접 레모네이드 등에 타서 마시면 되지만, 독일에서는 직접 타서 라들러라는 이름으로 상품이 출시된다. 특이한 건 독일의 주세법에 따르면 라들러는 주세가 면제되는데, 이들에게 이것은 술이 아닌 듯하다. 상점에서는 드라이브 맥주라는 이름의 맥주도 판매되는데, 알코올이 전혀 들어가 않아 운전할 때도 마실 수 있는 맥주이다. 실제로, 독일의 휴게소에 가면 많은 트럭 운전사들이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들에게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일상'인가 보다. 이렇게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좋은 맥주를 생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헬레스(Helles)와 둥클레스(Dunkles)

 독일 여행을 앞두고 몇 달 전부터 다양한 맥주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나라 맥주 전문점에서 맥주를 주문하려면 지식이 조금 필요했다. 에일과 라거로 맥주가 구분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에일은 효모들이 주로 위에 서식하면서 발효되는 맥주로 흔히 상면발효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라거는 효모들이 아래에서 서식하며 보다 천천히 발효되는 맥주로 하면발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상면발효는 풍부한 향과 맛이 나는 장점이 있고 하면발효는 강한 탄산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만반의 준비를 몇 달간 했건만 독일에서 주문하기는 의외로 매우 간단했다. 하면발효는 냉장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후기에 생겨난 기술이다 보니 옛날부터 양조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이어온 독일 양조장들은 대부분 에일을 생산한다. 그러다 보니 그냥 색깔로 간단히 구분해둔 게 다였다. 메뉴판에 보면 단순하게 하얀색이라는 뜻의 헬레스(Helles)와 까만색이라는 뜻의 둥클레스(Dunkles) 이렇게만 기재되어 있다. 헬레스는 줄여서 주로 헬(Hell)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가장 기본적인 맛의 맥주이다. 지역 표시제가 있어서 바이에른의 맥주들만 사용할 수 있으나,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많은 양조장들이 이 표시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얀색 맥주라는 뜻을 지역 표시제로 제한하는 것은 치사한 것 같다. 둥클레스는 줄여서 둥켈(Dunkel)이라고도 부르는데, 맥아를 볶아서 맥주를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 흔히 흑맥주라 부르는 스타우트나 포터와는 맛이 조금 달랐다. 커피같이 로스팅된 쓴 맛이 아닌 보리처럼 구수하게 볶은 맛이 올라오는 맛이었다. 심지어 독일 대부분의 음식점들은 자기들이 계약된 한 양조장의 맥주만 취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맥주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주문하는 데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딱 한 단어만 잘 외워올걸. 폼바스(Vom Fass, 생맥주)!

밀맥주들, 바이젠 (Weisen)

 독일순수령의 나라 독일에서 내가 가장 많이 마신 맥주는 밀맥주, 바이젠(Weisen)이었다. 지인은 비싼 돈 주고 독일까지 갔으면 기술로만 맛의 차이를 내는 유서 있는 독일 양조장들의 보리 맥주를 마셔보는 게 정석 아니겠냐며 나를 타박했지만, 내 입맛에는 부드러운 밀맥주가 딱인걸 어찌하겠는가. 밀맥주를 포기 못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맥주순수령은 빵 값 안정을 위해 만든 서민 생계 안정 정책이었지만, 귀족들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밀맥주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바이에른 공국에서는 데겐베르거 가문에게 밀맥주를 계속 빚을 수 있게 허가해주었다. 매우 비싼 세금이 붙는다는 조건을 붙였지만, 부유한 귀족들은 개의치 않았다. 세월이 흐르며 여러 양조장에서도 밀맥주를 만들기 시작했고, 명맥만 내려오던 맥주순수령은 1993년에야 폐지되었다. 그래서 맥주순수령의 고향인 바이에른에서 양조된 밀맥주는 바이젠(Weisen) 혹은 바이스비어(Wiesbier)라는 고유의 이름도 가지게 되었다. 독일순수령을 제정한 바이에른 사람들도 정작 포기 못한 바이젠을 난들 포기할 수 있겠는가.

브레첼, 소시지, 맥주... 이것보다 더 독일스러운 점심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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