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나의 첫 비거니즘 선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잠시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년 2월, 13학번 동기들과 12학번 선배 몇 명이 다함께 등짝에 거대한 바람개비 모양의 태풍 그림[1]이 그려진 네이비색 단체 후드티를 입고 “새내기 배움터”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우연히 버스 옆자리에 앉은 지윤과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 캠퍼스에서 OT를 하는 동안은 같은 조가 아니어서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지만,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대구 사투리의 이질적인 조합에서 뭔가 모를 편안한 구석이 있는 애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화장이란 걸 해본 적 없는 나에게 대학은 낯설고 때로는 숨고 싶은 곳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19에서 20이라는 문턱이 넘어감과 함께 모두 꾸밈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남자아이들의 외모는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여자아이들의 외모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내 쌩얼을 옹호해주던 “학생이 무슨 화장이냐”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효력을 잃었고, 눈 떠보니 어느 순간 쌩얼은 창피한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유려한 화장술로 예쁘게 꾸민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어딘가 위축됐다.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게 내 스타일이라고 믿고 살아왔건만, 캠퍼스에 입성하니 아무 손도 대지 않은 내 얼굴은 “스타일”이 될 수 없었다. 난 그냥 잘 못 꾸미는 애였다.
촌스러워 보이지 않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두덩이에 섀도우를 칠하고 아이라이너를 그려넣는 일은 사뭇 고단했다. 아이라이너는 그리면 그릴수록 삐뚤빼뚤해져서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곁눈질로 거울을 노려보려니 눈이 아팠다. 그래도 쌩얼로 다닐 수는 없어 잘 꾸미는 애들을 따라가려니, 난 꽤나 우스꽝스러운 화장을 한 채로 다녔다. 캠퍼스가 산에 있는데도 아이들은 구두를 신고 캠퍼스의 오르막길과 계단을 능숙하게 걸어다녔다. 뒤쳐지기 싫어 억지로 구두를 신으니 발꿈치는 자꾸만 까졌다. 외출을 준비하는 시간은 자꾸만 길어졌다.
그 속에서 지윤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 애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염색하지 않은 새까만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웃을 때 움푹 들어가는 보조개와 휘어지는 눈매가 눈에 띄었다. 나는 어디에 가든 주변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안에서 가능한 어긋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살았다. 그런데 지윤은 그렇지 않았다. 아주 느긋했다. 말투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부터 모든 것이 느긋했다. 앞질러 가려하지 않고 뒤쳐져도 그러려니 하는 것이, 대화를 나누다보니 마치 모든 것을 해탈한 승려의 바이브를 갖고 있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어느새 그 애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대화의 공백이 생기고 어색함이 흐르자, 나와 지윤은 출발할 때 새터책 선배가 나눠준 홍보집을 한 장씩 넘겨보았다. 지윤이 먼저 물어왔다.
“넌 하고 싶은 동아리 있어?”
한 때 세계를 평정하는 록스타의 꿈을 가졌던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난 파문 오디션 보려고! 나 기타 치거든. 넌 악기 하는 거 없어?”
“난 노래 하는 거 좋아해.”
“그럼 우리 같이 파문 오디션 볼래?”
파문은 사범대 록밴드 동아리이다. 누가 붙여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이미 수많은 관중 앞에서 기타 치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열다섯부터 방구석에서 독학한 기타 실력으로도 이미 오디션에 붙은 것처럼 설렜다. 일렉 기타는 쳐본 적이 없고, 어쿠스틱 기타 실력도 이제사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허접했지만, 나는 아는 록밴드가 많으니 떨어질 리 없다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록 스피릿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케이팝만 듣는 애들과는 다르다고 혼자서 좀 우쭐대는 면이 있었다. 한 마디로 스스로가 조금 특별하고 나의 취향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상당히 가증스런 면이 있었다.
그렇게 나와 지윤은 3월 초, 방배역의 코이합주실에 나란히 파문 오디션을 보러 갔다. 다행히 록 스피릿을 기반으로 한 나의 음악적 스노비즘은 파문 면접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우린 둘 다 2:1의 소박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파무너”가 되었다. 파문은 기수제로 운영이 됐는데, 한 기수에 보컬 두 명, 기타 두 명, 베이스, 드럼, 키보드 한 명씩으로 총 일곱 명이 있었다. 파문은 2001년에 시작되었으므로, 우리는 학번과 같은 동아리 기수를 얻게 되었다. 13기는 모두 13학번, 94년생 동갑내기의 사범대생들이었다.
우리는 밴드 활동을 하는 2년간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며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고향이 서울이 아닌 친구들은 실제로 가족보다 파문을 더 자주, 오래 봤다. 매주 화요일은 세 시간씩 함께 환기도 안 되는 합주실에서 서로의 땀냄새와 발냄새를 참으며 정기공연을 위한 합주를 하였고, 합주 뒤엔 필수 참석인 뒤풀이에 갔다. 매주 수요일은 바퀴벌레가 어디에 은신하고 있을지 몰라 차라리 청소를 포기한 사범대 9동 동방(동아리방)에서 점모(점심모임)를 했다. 동방에 모두 앉을 수 없어 누군가는 한 쪽 구석에 서서 먹을 지라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즐겁게 먹고 떠들었다. 유사 가족이었다.
2019년 12월 24일, 매일 오천 자 이상을 써내는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하였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애인이 없으면 괜히 서글퍼지는 명절이다. 하지만 파무너는 그렇지 않다. 서글프지 않다. 크리스마스엔 당연히 파문을 만나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연애 중인 친구들과 교회에 가는 친구들은 쿨하게 면제 대상이다. 그러므로 애인 없는 파무너 셋이 모였다. 키보디스트 진주와 보컬 현수이다. 우리 셋은 서촌에서 모여 와인과 함께 해물 떡볶이, 그리고 파스타를 시켜놓고 모여 앉았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또 너희로구나.” 퍽 익숙하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선생님들끼리 모인 대화는 학교로 시작해서 학교로 끝난다.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든 아이들 이야기, 업무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만 해도 하루가 부족하다. 애석하게도 직장이란 것이 다 그러하듯이, 학교에도 웃게 만드는 이야기보다 울게 만드는 이야기가 더 많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각자의 고된 학교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금이다.’ 친구들의 반응이 어떨 지 몰라 긴장과 걱정이 뒤섞였다. 나는 수업 중에 질문하는 학생 마냥 오른손을 들고 말을 꺼냈다.
“저, 할 말 있습니다.”
“뭐야. 뭐 생겼어? 누구 만나?”
파문이 아주 돈독한 것은 맞지만, 한 명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얼마간 과대평가하는 발언을 하였다. 만나는 사람이 있어도 크리스마스에 파문을 보러 나올 것이라고 말이다.
“누구 있었으면 여기 안 왔겠지. 나 결심했어. 비거니즘 하려고. 혹시 비거니즘 들어봤어? 고기, 해산물, 유제품, 계란 다 안 먹는 채식. 근데 한 번에 다 안 먹긴 좀 힘들어서 우선 고기만 안 먹고 당분간 해산물은 먹으려고.”
“그럼 나중에는 해산물이랑 우유랑 계란도 안 먹을 거야?”
“응. 나중에는 그러겠지?”
“오…”
친구들은 사뭇 놀랐지만 내가 비거니즘을 결심한 이유를 차분히 들어주었다. 동물권 독서모임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나니, 알면서도 먹는 인지부조화가 괴로워서 실천을 결심했다고 이야기하였다. 듣고 나니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물론 파문이라면 날 지지하고 응원해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에 털어놓기로 결심했던 것이지만, 정말로 고개를 끄덕여주니 안도감과 고마움이 뒤섞여 마음이 뭉클해졌다. 다만 고기를 안 먹으면 머리가 빠진다더라는 진주의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한동안 아침마다 욕조 개수대에 고인 머리카락 뭉치의 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연말이라 약속이 많이 잡혔고, 뜻밖에 여러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채식 선언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식당을 정하는 과정에서 고기 없는 메뉴가 있는 곳을 찾아야 했기에, 대부분의 선언은 카톡으로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며칠 후, 영어교육과 친구 하은과 여의도 IFC몰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카톡으로 하은에게 이제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으며, 식당을 내가 정해도 될 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가 갈 수 있는 식당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장소를 먼저 정하고 식당을 찾아보려니 샐러드 뿐이 보이지 않았다.[2]
뜻밖에도 내게 약속을 잡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고기를 안 먹는다고 말을 꺼내는 것보다 식당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먹는 것에 열정이 없던 나는 주로 아무데나 가거나 친구들이 먹고 싶다는 곳에 따라가는 편이었다. 길 걷다 괜찮아 보이는 곳에 들어가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식당이나 카페를 미리 찾아보고 가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미리 찾아보지 않고 만나면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을 감수해야 하게 된 것이다. “채식한끼” 앱이 큰 도움을 주었지만 마땅한 비건 식당은 늘 나의 동선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식당 마저 휴무일이면 아주 절망적이었다.
해산물이 들어간 메뉴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쌀국수집에서 보기로 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주문을 했다. 하은은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를 물었다. 사실 동물권을 먼저 접하고, 환경적인 이유까지 더해져 비거니즘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고기가 들어간 쌀국수를 먹을 친구 앞에서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략히 공장식 축산이 동물을 다루는 방식에 반대한다고 말하고 환경적인 이유를 설명하였다. 하은은 축산업이 탄소를 많이 배출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놀랐다. 나는 곧이어 나온 하은의 결혼 소식에 놀랐다. 우린 놀라움을 주고 받으며 헤어졌고 다음엔 비건 식당을 가보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채식 선언하는 일은 금세 익숙해졌다. 약속이 생길 때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하나 둘씩 이야기하니, 어느새 대부분 가까운 친구들은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 새해가 되었고,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예정된 모임은 하나 둘씩 취소되었고, 줌 채팅으로 친구들과 모여 각자의 방에서, 따로 또 함께 밥을 먹었다. 난생 처음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서야 했고, 개학은 계속 할듯말듯 연기되었다. 밖에서 친구를 보지 못하는 것은 슬펐지만, 한 편으로 약속 잡을 때 식당을 찾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안도감을 주었다.
파문 여자 멤버 넷 중 셋은 선생님이고, 한 명은 항공사에 다녔기 때문에 우린 모두 3월에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줌에서의 원격 만남이 지겨워진 우린 다 같이 진주의 집에 모였다. 함께 장을 봐서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우리 넷 중엔 요리왕이 없었기 때문에 평균적인 맛과 적은 실패 확률을 위해 레디메이드 소스는 필수였다. 핸드폰으로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파스타 소스 제품을 검색해보았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소스엔 고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기가 포함되지 않은 토마토 파스타 소스가 있었다. 그 제품도 꽤 큰 브랜드의 것이니 마트에 하나쯤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교통체증으로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고, 오랜만에 얼굴 보고 마주 앉은 기쁨에 한창 떠들다 보니 식사시간을 살짝 빗겨갔고, 배고픔이 밀려왔다. 장을 보러 가려 했더니 고맙게도 진주가 장을 미리 봐왔다는 것이다. 그 중엔 마트에서 산 파스타 소스도 있었다. 뒷면의 원재료 표기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소고기, 닭고기, 조개, 굴이 들어있었다. 이럴 땐 어찌해야하는 것일까? 집에서 마트는 멀고, 우리는 모두 무척 배고픈 상황이었다. 나도, 친구들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 소스병을 손에 쥐고 일시정지했다. 진주는 너무나 미안해했다.
“이런 소스에도 고기가 들어가 있을 줄 몰랐는데.. 그래도 0.7 퍼센트래. 0.7퍼센트는 괜찮지 않아? 거의 안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긴 한데..”
그렇다. 비거니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파스타 소스에도 고기가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나 역시 불과 몇 달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원재료표기라는 것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사실 고기는 거의 담궜다 뺀 정도로 들어갔으니 씹히거나 고기 맛이 느껴질 리 만무했다. 게다가 그는 멀리까지 와준 친구들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혼자 장을 보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왔다.
그런데 속이 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속수무책 속상했고 슬펐다. 그건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온전히 이해 받지 못한다는 서글픔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결심을 했을 뿐인데,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쩌면 공감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왜 0.7 퍼센트가 들어가도 먹고 싶지 않은지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다. 조리 있게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무얼 먹고, 무얼 먹지 않는지에 대해 나조차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막막했다. 더 명확하게 비거니즘을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외로워졌다.
그 소스를 먹고 싶지 않았지만, 배고픈 친구들을 기다리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팬에 달구어진 야채들을 가지고 파스타 외에 할 수 있는 요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스는 내가 고르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하나, 도착하자마자 이것부터 확인했어야 하나. 미리 챙기지 못한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먹기 전에 따져보고, 찾아보고, 준비해야 하는 습관은 내게 너무나 낯설고 번거로운 것이었다. 우선 어쩔 수 없으니, 오늘은 먹겠다고 하고 볶은 야채 위에 소스를 부었다. 친구들은 미안하고, 배려해주어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우린 배불리 먹고, 설거지하고, 또 쉴 틈 없이 떠들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집에 오는 길, 강변북로를 달리며 낮에 묻어두었던 속상함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상한 속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이 속상함의 귀책사유일까. 내가 비거니즘을 처음 접하고도 거리를 두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네덜란드에서 비건 친구들을 보며 내가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그 때 내 모습은 오늘 내 친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더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고기를 먹는 친구들과 우정을 지속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에 대해.
“나 이제 고기 안 먹어”라는 말의 의미는 동물이 우리 밥상에 얼마나 촘촘히 존재하는지를 인식하게 된 나와, 그렇지 않은 친구들에게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말의 의미는 오늘의 나와 불과 몇 달전, 비거니즘과 거리를 두던 나에게도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한 마디로 나의 달라진 밥상 생태계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밥상에 대한 이해의 폭은 말 한 마디로 좁혀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나의 논비건 친구들은 한 걸음이 아니라, 열 걸음에 걸쳐 서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오늘은 실패가 아니라고 힘주어 믿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는 0.7 퍼센트도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용기로, 친구들은 미안하다는 진심으로 서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좋은 출발이었다. 비거니즘은 선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언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점이 아니라 선이었다. 하나의 납작한 순간이 아니라, 무수한 상호이해의 과정이었다. 함께 하기 위해선 내가 나를, 비거니즘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이해하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했다. 기다리기 위해선, 논비건 친구들의 시선도 상상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과거에 지녔던 감각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고, 옆구리에 단단히 낀 채로 소생된 감각과 부단히 공존시켜야 했다.
나는 다만 동물을 먹지 않기로 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타인의 시선을 더 열심히 상상하는 법을, 서로를 더 온전히 껴안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함께 하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해졌다. 나는 외로웠고, 동시에 외롭지 않았다. 그것은 양립 가능했다. 비거니즘은 단순한 불매운동이 아니었다. 나와 비인간동물과, 나와 다른 인간동물이 더 찐득하게 엮이는 방법이었다.
[1] 당시 과 활동은 영어교육과와 외국어교육계열 학생이 함께 있는 반 단위로 운영되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 이름은 태풍반이었다.
[2] 채식과 생식은 종종 혼동되는 개념이어서, 내가 채식을 한다고 말하면 샐러드만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샐러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익힌 채소가 소화도 더 잘 되고 더 맛있다.
[3] 나는 자칭 좁은 인맥의 선구자로서, 친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