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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Aug 30. 2022

육수를 끼얹어도 당신 없인 못 살아(2)

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Chapter 2. 나의 비거니즘 선언기


세 번째 이야기. [육수를 끼얹어도 당신 없인 못 살아](2)


  어느 일요일 밤이었다. 출근을 위해서는 다섯시 반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재미있는 일이 다 벌어지는 열 시쯤이면 잠에 들어야 했다. 해가 지면 돌연 하고 싶은 게 많아지는 법이다. 꾸물럭대다보니, 어느덧 시계는 아홉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시락을 싸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금요일에 퇴근하며 사두었던 꽈리고추와 새송이버섯을 꺼냈다. 간장 양념을 해서 볶아볼 생각이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니 엄마가 방에서 나오셨다. 아직은 나의 요리실력이 못미더우신지 옆에서 구경하시며 어설프다 싶을 때면 하나씩 요리비법을 전수해주셨다. 고맙지만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 주무시라고 했지만, 엄마는 내 요리가 궁금한지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조금 넣고 다듬어놓은 꽈리고추와 버섯을 넣었다.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간장만 살짝 넣었을뿐인데 달큰한 냄새가 부엌에 진동했다. 맛있게 달달 볶여지는 꽈리고추와 송이버섯을 보며 흐뭇했다. 내일의 점심시간이 벌써 기다려졌다. 그런데 돌연 엄마가 투명한 연갈색 액체가 들어있는 그릇을 집어 나의 꽈리고추 볶음에 투하하시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를 이해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거 뭐야? 뭐 넣은거야?”


“육수. 이거 넣으면 더 맛있어.”


“하.. 내가 고기 안 먹는다고 했잖아.”


“많이 안 넣었어. 조금 넣었어. 너 반찬 더 맛있게 해주려고 그러지.”


시계는 이미 열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잘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완성을 향해 가던 나의 반찬에는 육수가 들어가버렸다. 별안간 화가 치밀었지만 더 화를 내면 맘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한숨을 쉬며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어도 안 먹어. 고기 안 먹는다고 했잖아... 내가 먹을 수 없는 요리를 만들어버렸잖아.”


  짜증 섞인 한숨을 연달아 쉬고 투덜거리며 새로운 후라이팬을 꺼냈다. 어쩔 수 없었다. 더 화를 내느니 그 힘으로 내일 먹을 밥을 만드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엄마와 나의 관계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었다. 봉지에 남은 소량의 꽈리고추와 새송이버섯을 넣고 새로 반찬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반찬에는 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겼다. 화를 삭이며 성의 없이 만든 반찬은 지독하게 맵기만 하고 맛이 없었다. 별 수 없이 맵고 맛없는 꽈리고추 볶음을 도시락에 담아놓고 잠에 들었다.


  날이 밝았다. 월요병에 걸린 직장인들이 한데 쏟아져나온 행주대교는 늘 그렇듯 꽉 막혀 있었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으며 어젯밤의 일과 파스타 소스 사건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그랬던 것처럼, 엄마, 아빠와도 ‘나 이제 고기 안 먹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많은 단계가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입장에서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니 육수는 괜찮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할 수록 힘이 빠졌다. 내 설명이 부족했던 탓일까, 나는 왜 설명도 조리 있게 못 해서 이런 일을 만들까. 그 이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얼마나 더 상세히 설명해야 하는 것이고, 그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일까. 이렇게 동물을 먹지 않는 일로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곱씹어 문제의 원인을 생각해보고 해결하고자 혼자만 바득바득 애쓴다는 생각에 지쳤다. 매일 이곳저곳에서 공장식 축산의 이면을 인식하게 되어버린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논비건인 친구들과 가족 사이에서 공감 받지 못한 문제를 껴안고 혼자 고민하고 씨름하며 실천을 이어나가는 것이 고행으로 느껴졌다.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것은 힘들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서 그만 둘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비건 지향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동안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갔다. 엄마는 그날 이후 내가 먹는 것에 육수를 넣지 않으셨다. 국에 자주 쓰시던 멸치분말과 새우분말 대신에 표고버섯 분말을 넣으셨다. 하지만 유제품과 계란을 먹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시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왜 우유와 계란까지 먹고 싶지 않은지를 차분하게 설명하는 법을 여전히 터득하지 못했고, 엄마는 “그래도 그 정도는 그냥 먹고 살면 안 되겠니”를 굽히지 않으셨다.


  우리 모녀는 그렇게 각자의 고집을 붙들고 서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답답해했다. 그러면서도 주말이면 같이 책을 한 권 씩 들고 일부러 공원을 산책하며 먼 길을 돌아 동네 단골 카페에 갔다. 마주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각자 들고 온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집에 가는 길에는 팔짱을 끼고 오늘 읽은 책 이야기, 나의 학교 이야기, 엄마의 친구 이야기 등 별 거 없는 이야기를 종알종알 나누었다. 그러다 비거니즘 이야기가 나오면 또 서로 얼굴을 붉히고 다투며 집에 들어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 주말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책을 챙겨서 산책을 하고 카페에 갔다.


  우유와 계란을 먹지 않는 나를 보고 왜 그렇게 유별나게 살아야 하냐며 나를 가장 외롭게 만드는 사람은 엄마였다. 하지만 내가 산 채식만두를 함께 먹어주고 스프에 고기 대신 버섯을 넣어 만들어주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방법으로 날 외롭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도 엄마였다. 그랬기에 어느 때보다 엄마가 멀게 느껴지는 날에도 엄마와 멀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는 동안 나는 엄마가 나를, 비거니즘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비로소 내려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생각도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내가 비거니즘을 하며 쓸쓸하고 힘들다고 호소할 때마다, 엄마는 “그러니까 우유랑 계란 정도는 먹으면 안 되겠니”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가 비거니즘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무력해졌다. 하지만 반복해서 다투고 이야기할 수록 그 안에 들어있는 다른 뜻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사회 평균인에서 벗어나게 된 딸의 외로움에 대한 엄마의 걱정이 있었다. 내가 너무 유별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게 최고라는 어른들의 납작한 조언이 아니었다. 내가 회식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위축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날을 단단히 세우고 고집을 부리면서까지 나의 외로움을 걱정해주는 건 엄마가 유일했다.


  그동안 나를 가장 지치게 했던 것은 논비건 주변인들과 마찰이 생길 때 그들의 입장을, 그리고 비거니즘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외로움과 버거움이었다. 하지만 내 몫의 고단함만 지켜보는 동안, 사실 친구들과 가족 역시 나를 이해하고 함께 하기 위해 상상력을 쏟고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무도 나를 따라 비건 지향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와 만나는 날이면 친구들은 함께 비건 식당을 탐방하러 다녔고, 맛있는 식당을 찾으면 함께 기뻐했으며, 때로는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해도 불평하지 않았다. 내가 파티에 오면 반반 피자를 시켜 한 켠은 비건 옵션으로 주문했다. 그건 정말이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해와 사랑이 깊어지기 위해선 겸손함이 필요했다.


  이듬해 서울의 벚꽃은 거의 다 떨어졌을 때 즈음, 우리 가족은 엄마의 은퇴를 기념하여 당일치기로 춘천 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내가 운전대를 잡고 떠난 가족 여행이었다. 네 명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손에 땀이 나고 어깨가 자꾸만 귀와 가까워졌다. 아빠 차가 익숙해지고 한껏 올라갔던 어깨가 내려올 때쯤 춘천에 도착했다. 아직 다 떨어지지 않은 벚꽃과 함께 날아오는 봄바람은 텁텁하고 달큼했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빠는 소주잔을 번쩍 들어올려 엄마, 언니에게 돌아가며 한 마디 씩 건배사를 하셨다. 마지막으로는 나를 바라보며 찰랑이는 소주잔을 내미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은이! 나는 지은이가 비건, 그거 한다고 결심하고, 지키는 거, 그거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자, 올해도 우리 가족 건강합시다.”


무뚝뚝했던 아빠의 표현력이 나날이 풍부해지는 덕에 눈물 참기 미션의 난이도는 해가 지날수록 어려워진다. 무거워진 눈동자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마에 주름을 잡아 눈썹을 들어올린 채 소주를 삼켰다.


  여전히 우리 가족은 나를 빼고 모두 고기를 먹는다. 명절이면 거대한 통에 갈비찜을 만든다. 나는 갈비찜에 들어갈 채소 손질을 돕는다. 갈비찜을 돕는 비건 지향인이란 모순 투성이 삶이지만, 비거니즘은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사랑은 내가 모순 앞에서도 실천을 멈추지 않을 용기를 준다. 그리고 비거니즘은 매 순간 이 거대한 사랑이 나의 능력만으로 다져진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나와 함께 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나의 사람들과 함께 키운 사랑임을 가르쳐준다. 비거니즘을 들여온 후 난 세상을 향해 뾰족해지는 동시에 사랑 앞에서 한없이 말랑해진다. 단단해진 사랑 근육으로 말랑한 힘을 내어 오늘 먹은 도시락통을 씻고 다시 내일을 위한 도시락을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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