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가장 귀찮으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집안일을 꼽으라면 분리배출이다. 가장 귀찮은 이유는 집 안에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에선 뭐라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위태롭게 쌓아 올려진 분리배출 바구니를 들고나가는 일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생각 없이 맨 위에 비닐이나 스티로폼을 올려두었다면, 바람에 날려 도주하는 쓰레기 쫓아가다 바구니 속 공든 쓰레기 탑이 전부 무너지기 일쑤다.
한 편 분리배출의 흥미로운 점을 꼽자면 의도치 않게 회고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소비가 낳은 쓰레기만큼 소비를 축으로 돌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기록해주는 것도 없다. 쓰레기를 하나씩 꺼내 수거함에 넣으며 그에 얽힌 일화를 떠올리다 보면, 한 주간 내 삶의 궤적을 역추적할 수 있다. 이만한 일기가 따로 없다.
우리 집은 분리배출을 아주 철저하게 하는 편이다. 비닐에 붙은 스티커는 일일이 가위로 오려내어 버리고, 플라스틱이나 비닐은 버리기 전에 안의 내용물을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깨끗이 씻어 버린다. 유리병에 붙은 스티커가 잘 떼어지지 않으면 물에 녹인 후 칫솔로 문질러서 거의 완전히 벗겨낸 후에야 분리배출 통에 넣는다.
5년간의 자취 끝에 본가에 복귀한 후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우리 집의 까다로운 분리배출 기준이었다. 가끔 귀찮아서 비닐에 스티커가 붙어있는 채로 버리면 엄마가 제대로 오려서 버리라며 가위와 비닐을 방에 놓고 가셨다. 하지만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기후위기에 관심이 생긴 후론 자유의지로 그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키며 살았다. 분리배출을 위해 시간과 땀을 낼 때면 뿌듯했다. 그렇게 잘 버리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여느 토요일 오후와 마찬가지로, 엄마와 카페에 가는 길이었다. 아파트 단지 한 켠에 비닐이 꽉 차있는 거대한 쓰레기봉투 스무 여 자루가 쌓여 있었다.
“이번 주 쓰레기 차가 안 왔나보네.”
“아니야, 저거 작년인가부터 그랬어. 요즘 비닐을 안 받아줘서 못 버리고 있다잖아. 코로나 때문에 더 많아져서 그런가.”
작년부터 그랬다는데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도 놀랍지만, 쓰레기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에서 한 번 더 놀랐다. 쓰레기 수거 업체가 쓰레기를 안 받아준다니? 재활용하거나 태우거나 묻으면 되는 거 아닌가? 가만 보니, 나는 고기가 어떻게 밥상까지 오는지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버린 쓰레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분리배출을 잘해서 버리기만 하면 어디선가 어떻게든 재활용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각자의 쓰임이 있었던 물건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쓰레기”가 되어버린 후엔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는지는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었다. 난생처음 쓰레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찾아보았다.
우리가 분리배출한 플라스틱 쓰레기는 선별장에서 분류작업을 거쳐 일부는 재활용되고, 나머지는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2018년 초 중국이 재활용 쓰레기 수입을 거부한 데에 이어, 코로나 때문에 배달 용기 등 일회용품 사용이 급격하게 늘어나며 선별장에는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쌓여만 가고 있었다. 쓰레기를 더 가져와봤자, 팔리지도 않고 인건비만 더 나오는 상황이기 때문에 업체들은 더 이상의 수거를 거부하고 있었다. 기사에 첨부된 사진들과 영상을 보니 압축된 플라스틱 폐기물과 비닐 폐기물이 엄청난 높이로 쌓여 있었고 오랜 기간 방치되어 그 꼭대기엔 넝쿨이 자라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기물의 종류가 생각보다 많고, 재활용률이 알던 것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이다. 플라스틱 빨대와 즉석밥 용기는 재활용이 가능하지 않고, PP(폴리프로필렌), PE(폴리에틸렌) 등 여러 소재가 혼합된 화장품 용기 역시 일반쓰레기다. 우리나라의 재활용률이 60% 정도로 높은 편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다른 물질로 재탄생시키는 물질 재활용의 비율은 2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60% 정도는 소각되어 SRF 고형연료[1]가 되고, 20% 정도는 매립되고 있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재활용률 60%”는 고형연료로 소각시키는 것을 포함시킨 수치인데, 소각하는 과정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물질이 나온다.
비거니즘을 실천하며 탄소발자국을 많이 줄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다른 곳에서 탄소가 줄줄 새고 있었다. 화석연료를 줄여야 한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플라스틱이 석유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플라스틱 쓰레기의 심각성은 외면하고 있었다. 석유나 가스를 추출하고 정제하여 플라스틱을 생산하고, 분해하고, 소각하는 전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가 배출되는 것은 당연했다. [2] 지구를 살리기 위해, 내가 지구에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 동물성 식품의 소비를 멈추는 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일회용품을 최대한 쓰지 않고, 쓰레기를 가급적 적게 만들기 위해 애써야 했다. 기후위기를 늦추기 위해선 비거니즘과 제로웨이스트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이었다.
일상의 모든 장면에서 플라스틱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들어서면 샴푸, 바디워시, 칫솔 등 모든 것이 플라스틱이었다.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바꿔보았다. 먼저 대나무 칫솔과 고체치약을 써보기 시작했다. 텀블러도 열심히 들고 다니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는 머그컵에 달라고 이야기하는 습관을 들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플라스틱은 줄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선 플라스틱이 새끼를 치는 것 같았다. 써도 써도 또 나왔다. 베란다의 붙박이장을 열어보니 그동안 사뒀거나 선물 받은 치약, 바디워시, 샴푸, 바디오일 등 평생을 써도 다 못쓸 것 같은 플라스틱 제품들이 쌓여 있었다.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인플루언서들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샴푸바, 식물모로 만든 빨대 솔, 천연수세미 등 사야만 할 것 같은 제로웨이스트 제품들이 즐비했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나의 논비건 화장품들이었다. 화장품의 붉은색이 연지벌레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안 뒤로 열 개가 넘는 각양각색 립스틱들을 먼지 쌓인 채로 방치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두 재활용도 되지 않는 용기에 들어있었다. 지구를 위하는 비건 지향인의 공간은 이런 생김새면 안 될 것 같은데, 내 방이 흉측한 쓰레기 더미로 보이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물건들을 모조리 비건/제로웨이스트 제품들로 변신시키는 해리 포터의 마법 지팡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난 호그와트에 다니지 않고 쓰레기 처리에 마법은 없다. 물건의 쓰임이 다 할 때까지 소진하고 깨끗이 씻어 분리배출하는 순수한 인고의 시간과 정성만이 해결할 문제였다. 물건들을 들여온 것은 나의 선택이니, 지구에 해가 덜 가는 방식으로 책임지는 것 또한 나의 몫이었다. 가족과 함께 살기 때문에 제약이 많았지만, 적어도 내가 산 물건은 끝까지 쓴 후 비건/제로웨이스트 제품으로 천천히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 쓰지 않는 화장품은 주변 지인에게 물어보고 받겠다고 하면 나누어 주었다. 지인의 선택을 받지 못한 화장품들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당근마켓으로 처리했다. 입지 않는 옷과 신발도 팔았다. 나의 공간에는 조금씩 여백이 늘었다. 그럼에도 필요한 것들은 여전히 충분했다.
물건을 하나씩 정리할 때마다 불필요하게 많은 물건과 살고 있었음을 느꼈다. 중고 거래를 하러 물건을 들고나갈 때면 그것을 소비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소비에는 많은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해 보여서. 이게 있으면 내가 더 멋져 보일 것 같아서. 스트레스 받았으니 홧김에. 마지막 세일이라고 해서. 필수 아이템이라고 해서. 하지만 소비할 때의 쾌락과 만족감은 찰나였고, 대부분 금방 싫증을 느꼈다. 그 물건들이 내 것이 됨으로써 삶이 더 행복하거나 충만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세상을 떠난 뒤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은 채 지구를 떠돌고 있을 쓰레기 유령을 들여온 셈이었다.
자본주의의 소비문화는 사고 쓰는 것까지만 생각할 뿐, 쓴 뒤에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잘 고려하지 않는다. 생산과 소비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폐기는 소비문화에서 말끔히 도려내져 비가시화된다. 폐기 과정의 비가시화는 지극히 시장주의적인 산물이다. 더 많은 물건을,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도록 만들려면, 물건을 욕망하고 또 욕망하게 하려면, 그 물건이 쓰레기가 될 추악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상상할 여지를 주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화려한 광고 속에서 탐스럽게 반짝이는 신상품들의 모습은 그 역시 언젠가 쓰레기가 될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양, 소비의 욕망만 남긴 채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물건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이제 내게 남은 물건들과는 풍성한 관계를 유지하며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었다. 물건 하나하나에 애정을 느끼며 그 속에 경험과 감정의 자취를 쌓아보고 싶었다. 질리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마음에 드는 물건들로 내 공간을 채우고 싶었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욕구들이었다. 낯선 욕구에 갈증을 느끼며 오래 쓸 수 있는지를 소비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소비가 사회의 어느 부분을 살찌우는지, 혹은 피폐하게 만드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식탁을 넘어선 모든 곳에서 나의 소비 지형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비거니즘은 흔히 금욕, 그리고 결핍을 연상시킨다. 비거니즘을 실천하면 평소 문제의식 없이 소비하던 많은 것들을 삶에서 덜어내야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비워냄은 새로운 감각과 욕구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비거니즘은 나의 일상 모든 곳을 구석구석 흔들어 균열을 낸다. 그 균열 사이로 낯선 욕구와 호기심이 피어오른다. 그들을 온전히 느껴보고 그에 응답하기 위해, 조금씩 초점이 바뀌어가는 시선을 분주히 따라간다. 따라가 보면, 비가시화된 또 다른 진실들을 마주한다. 고기는 밥상까지 어떻게 오는지를 알고 나면, 내가 버린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지도 궁금해지듯 말이다.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익숙했던 것에 질문을 던지며, 앎과 행동의 모순 속에서 난 매번 내 존재의 부박함을 마주하고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이 싫지 않다. 부끄러움은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 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떠한 방향과 나아갈 곳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일이 있고 다음이 있다는 것, 그것이 살아있음의 가장 진솔한 감각인 것만 같다.
빈틈 투성이인 실천을 하며 나는 오늘 또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더욱 살아있다고 느낀다.
[1] 가연성이 높은 고체 폐기물을 연료화 시킨 재생 연료로, 화력 발전소 등의 보조연료로 쓰인다. SRF 연료제품은 연소 과정에서 대기오염을 가중시키는 유해물질을 배출하여 수도권 사용이 제한되었으며, 2018년 통과된 ‘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개발・이용・보급 촉진법’이 통과됨에 따라 신재생에너지에서도 제외되었다.
[2] 국제환경법센터(Center for international Environmental Law)에 따르면, 전 지구적 과제인 2050년까지 산업화 대비 평균기온 상승폭 1.5℃ 이내를 유지하기 위해 남은 탄소 예산의 10~13%가 플라스틱 생산만으로 소진될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