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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Sep 13. 2022

이분법의 언어를 가로질러(1)

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Chapter 3. 끊임없이 불화하고, 화해하고


세 번째 이야기. [이분법의 언어를 가로질러](1)


  초중고와 대학까지 도합 17년의 학교생활을 마치고 학교는 이제 끝일 줄 알았는데, 직장생활이 곧 학교생활이 되었다. 중간고사를 치고 한 숨 돌렸다 싶으면 기말고사가 찾아오는 삶은 끝인 줄 알았는데.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게 남의 일이 될 줄 알았는데. 그 꽃말에 출제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쉴 틈 없는 학년초가 지나고 이제야 좀 정신 차리려는데, 벌써 중간고사 출제 시즌이다. 머리를 굴리며 지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서술형 문제를 내기 위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머리를 쥐어짜게 하기 위해 내 머리부터 쥐어짜야 한다. 교육이란 대체 뭘까? 엄.. 댓츠 어 빅 퀘스쳔.


  학교생활은 종소리라는 고도의 시간 규율 하에 생활해야 한다는 책무를 수반한다. 내 인생도 종소리 따라 50분, 10분 단위로 흘러가는 기분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5년차다. 아무리 생각해도 쉬는 시간 10분은 좀 너무하다. 종 치고 교무실에 돌아와 겨우 숨 좀 돌리려고 하면 아이들이 찾아온다. 대부분 필요한 질문과 요청이긴 하지만 가끔 물음표의 형태가 흡사 갈고리와 겹쳐 보인다. 연쇄 갈고리 살인마가 등장하면 화장실을 포기한다. 갈고리를 하나씩 빼서 해결하다 보면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친다. 시간표를 확인한다. 4반. 체크. USB랑 프린트, 체크. 교실로 출발. 교실 앞에 다 와서야 어딘가 가볍게 느껴졌던 가방 무게의 참 뜻을 헤아린다. 아, 교과서 두고 왔구나. 고 백 투 더 교무실.


  계속 서서 큰 소리로 말하고,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수십 명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일은 쉽지 않다.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선 체력이 좋아야 한다. 친절함도 체력에서 나온다고, 지쳐 있을 때 똑같은 질문을 세 번 이상 받으면 세 번째 대답부턴 약간의 짜증이 묻어나온다. “그거 어제 종례시간에 분명히 얘기했던 건데”하고 공연히 사족을 붙인다. 째째한 걸 알지만 나도 사람인 걸 어쩔 수 없다. 공강시간에는 행정업무(코로나 때문에 요즘은 출결서류 정리만 한 시간이 걸린다)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다. 수업 갔다온 사이에 쌓인 메세지를 읽고 처리하다 한 교시가 끝난다. 결국 출제나 수업 준비는 퇴근 후 집에서 한다. 물론 집에서 일하면 초근 수당은 없다. 그렇다고 학교에 남는 건 더 싫다.


  ‘다음 공강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내야 집에 가서 일을 덜 하는데. 뭐 내지?’하며 교무실에 돌아왔더니 책상에 초콜릿 하나가 놓여 있다. 둘러보니 자리마다 하나씩 올려져 있다. 어떤 천사 선생님께서 출제기간에 힘 내자고 나눠 주신 것이다. 논비건일 때 아주 좋아하던 초콜릿이다. 수능 볼 때도 가져갔고, 임용고사를 볼 때도 가져갔다. 가장자리의 과자층을 와자작 씹어 흐르는 초콜릿을 파고들면 마지막에 온전하게 보존된 헤이즐넛을 만나게 된다. 난 그 초콜릿의 맛을 너무나 잘 안다. 마침내 헤이즐넛을 조우할 때의 그 기쁨을 너무나도 잘 안다. 조회부터 1, 2교시 연강을 몰아치고 온 나는 상당한 공복감을 느낀다. 아침을 분명히 먹었는데. 심지어 꽤 많이 먹었는데. 번뇌의 순간이다.


  나는 군것질을 즐겨 하는 편이 아니다. 특히 가공식품은 어딘가 음식처럼 느껴지지가 않고 소화도 잘 안 돼서 논비건일 때도 좋아한 적이 없다. 내 돈 주고 과자, 청량음료, 패스트푸드를 사먹은 적이 거의 없다.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은 얼마간 예외였지만 그조차 자주 먹는 편은 결코 아니었다. 아주 가끔 초콜릿을 사면, 네모 반듯하게 그어진 선을 따라 한 조각 씩 쪼개서 거의 열흘에 걸쳐 야금야금 나눠 먹곤 했다. 단 음식을 한꺼번에 많이 먹는 것에 어떤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분 안에 수분충전과 당충전을 해야 하는 교사의 삶을 시작한 후로, 한 번에 먹는 간식의 양은 여전히 적었지만 빈도는 늘었다. 학교엔 수능, 개교기념일 등 간식이 나오는 행사가 많기 때문이다. 학교가 큰 편이라 선생님들도 많으니, 자연히 결혼식도 많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간식이 들어오는데, 매번 거절하기도 참 곤란하다. 무엇보다 오며 가며 간식을 쥐어 주시는 선생님들이 아주 많은데, 이건 몇 년째 가장 어렵다. 바삐 지나가는 복도에서 캬라멜 하나, 초콜릿 하나를 건네 주실 때마다 거절하며 비거니즘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또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나 그리 가깝지 않은 사이라면 더욱이 그런 설명을 하며 거절하는 것은 엄두가 안 난다. 그러니 일단은 받아서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학생에게 줘야지, 하고선 당이 떨어질 때 눈에 밟히고야 마는 것이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그렇다. 나는 사실 비거니즘을 지향한 후로도 그렇게 학교에서 받은 논비건 초콜릿이나 젤리 한 조각씩을 종종 먹었다. 털어놓은 김에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논비건 아이스크림도 먹은 적이 있다. 그건 심지어 너무 먹고 싶어서 내 돈 주고 사먹었다. 이렇게 꽁꽁 감춰온 비밀을 뱉어내고 나니, 이미 제대로 혼이 난 기분이다.


  비건은 논비건 음식을 안 먹는 거 아니냐고? 그보다 먹고 싶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 그걸 먹으면 비건이 아닌 거 아니냐고? 내 말이 그 말이다. 단순명료하게, 비건이라면 말 그대로 논비건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비건 지향인으로서 단단히 잘못된 일을 저질렀노라, 세상에 길이 남겨질 이곳에 이렇게 고해성사한다. 단언컨대, 나는 지금 떳떳하게 부족함을 꺼내 놓고 능청스럽게 이해 받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땅굴을 파서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이 몇 번의 행동이 앞서 비거니즘에 대해 내가 써내려간 모든 고민과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까 두렵다. 비거니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심게 될까 상당히 염려된다. 그러니 부디 독자들은 끝까지 읽어 달라.


  나는 그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에 들어간 소젖과 닭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주 명확하게 안다. 젖이 계속 나오는 소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소가 몸이 망가질 때까지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 고통스럽게 젖을 짜낸다는 것, 생산력이 없다는 이유로 남자 병아리는 분쇄기에 갈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밀집사육 때문에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사육 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다량의 항생제를 투여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공장식 축산의 진실을 알게 된 후 인지부조화로 괴로워하면서도 고기를 먹었던 시기는 아주 짧았다. 고기는 다른 생명의 살점이란 것이 명확하게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인지부조화를 오래 견디기 어려웠다. 동물권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한 달 만에 고기를 끊었다. 하지만 소젖과 닭알은 한없이 무해해 보였다. 쿠키와 초콜릿으로 변모하면 본래의 색깔도, 형태도 사라진다. 소젖과 닭알을 생산하기 위한 폭력은 핏기가 그대로 서린 고기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비가시화 된다.


  나는 비거니즘을 결심하고도 그 강력한 비가시화의 통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봤자, 한 달에 한 두번 조그만 거 하나 먹는 건데’ 라고 생각하며 입에 논비건 간식을 넣었다.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을 알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했고, 그렇게 간편하게 당을 충전한 후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괴감 위로 물음표가 피어올랐다. “이거 한 개를 먹으면 나는 비건이 아니게 되는 걸까?” “진짜 비건은 손톱만한 것이라도 동물성 식품과 제품도 소비하지 않는 건가?” “그런 사람들이 정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진짜 비건이” 아닌 것일까?” “비건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비거니즘을 지향하기로 결심한 후로 내게 비거니즘이란 단어는 언제나 명료했다. 나의 삶에는 고기와 물살이를 먹는 일 등 걷어내야 할 동물착취가 너무나 많았기에, 도달해야 할 지점이 무척 명확해보였다-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 동물성 제품을 쓰지 않는 것. 비거니즘의 뜻을 잘 말할 자신도 있었다-“비거니즘이란 생활의 모든 면에서 동물에 대한 착취를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일 년 넘게 흐른 시점에, 돌연 비거니즘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질문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하면 되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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